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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Nov 14. 2023

가을을 보낼 준비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가을비가 내리더니 기온이 10도가량 떨어졌다. 외출 준비를 하면서 울코트를 꺼내 입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골이 깊은 스웨터를 입고 발목을 덮는 스웨이드 부츠를 신고. 아직 좀 과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문을 나서는 순간 코 끝에 걸리는 찬기에 몸을 감싼 포근한 차림이 다행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뭔가 아쉬웠다. 아직 겨울은 아니잖아,라고 고집하고 싶은 마음. 내겐 가을을 보낼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




가을의 시작, 단풍길 걷기


10월이 되자 공기의 질감이 바뀌고 하루가 다르게 창 밖의 나뭇잎이 색을 바꾸었다. 밖으로 나오라는 식물의 신호. 긴 겨울이 오기 전에 몸에 빛을 채우라는 기별같다. 그때부터 짬이 날 때마다 길을 걷는다. 


동네 공원과 도서관 가는 길, 종종 들르는 카페를 향하며 눈에 담는 단풍으로도 충분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어 어딘가를 찾아가는 것도 이맘때에 하는 일이다. 고즈넉한 경내에서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성북동 길상사나 커다란 은행나무가 노란빛을 드리우는 덕수궁에 간다. 경복궁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길이나 붉은 빛 단풍나무와 마로니에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양재천 시민의 숲으로 약속해 둔 사람처럼 걸음을 옮긴다.


나이가 들수록 어느 날 홀연히 자신의 색을 바꾸는 나무들이 경이롭게 다가온다. 잠자코 머무는 듯했던 지난 계절 동안 저마다의 색을 제조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았음이 헤아려져서다. 자신이 어떤 색을 만들게 될지 나무는 예상할까. 타들어갈 듯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미래의 빛을 확정하지 못한 채 색소를 정제하는 일은 날마다의 일과 삶에서 불확실함을 견디는 인간들의 내적 고투와 유사할 것이다. 막막함과 불안이 덮치더라도 잠자코 오늘의 빛을 채우는 데 충실했을 것이다.  


바닥에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 바스락바스락 속삭이는 소리가 난다. 시간이, 빛이, 발 아래서 부서진다. 고개를 들면 가을볕 아래 환하게 빛을 뿜어내는 노랗고 붉은 것들이 손바닥처럼 흔들리며 인사를 건넨다. 때 맞춰 우리 앞에 드러낸 다채로운 색이 자신의 몫을 무사히 해낸 나무의 기쁨이며 세계의 아름다운 일부이고자 하는 헌신임을 깨닫는다.


가을 단풍은 나무 안에서 시간과 빛의 함수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건 삶이 하는 일과도 비슷해 보인다. 우리 또한 각자의 삶에서 시간과 빛의 함수를 운용하고 있으니. 누구도 시간을 비켜나 살 수 없고 빛 없이 생활할 수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빛을 택하고 들이고 피하고 다듬고 모은다. 시간과 공을 들이는 일이 모두의 삶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시간의 손에 쓸려 저마다의 빛깔로 짙어질 것이다.  


내게 빛처럼 다가오는 것을 떠올려본다. 일을 하고 가족들의 안녕을 살피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이 씨실처럼 흐른다. 그러는 틈틈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을 날실처럼 더한다. 산책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케이크를 굽고, 모임에 나가고 친구를 만나는 일,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찾아가 영혼을 울리는 그림이나 영화에 빠져드는 일, 그런 날실을 씨실에 더해 삶의 무늬를 짓는다.


내가 엮는 삶의 조각이 당장은 어떤 무늬와 색을 띠는지 알 수 없다. 색을 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무기력과 불안이 엄습하기도 한다. 하지만 빛처럼 오는 것을 성실히 사랑하며 견뎌낸다면 나무들처럼 어딘가에 색이 고이고 나이테처럼 무늬가 새겨지지 않을까. 


그 해의 최선으로 탄생한 빛깔 고운 나뭇잎을 주워 책 속에 끼운다. 나무의 마음으로 묵묵히 사랑하고 싶다는 다짐을 책 속에 봉인한다. 올해는 거미줄처럼 섬세한 구멍을 가진 잎사귀와 점처럼 작은 생채기에서부터 동심원으로 색이 번지는 잎사귀에 손이 닿았다. 흠집과 상처를 지니고도 물들 수 있다고 보여주는 나뭇잎이 나를 격려한다. 흠결이 있고 부족하더라도 시간을 쌓아 당신만의 색을 낼 수 있다고.




각자의 삶의 빛을 모으며


시간의 마모는 피할 수 없고 달리 손 쓸 수 없는 문제도 닥치고 말겠지만, 눈 앞의 계절을 기쁘게 맞이하며 흔들리는 순간에 나를 붙잡아줄 빛과 힘을 모은다. 성실히 마감을 맞추고 틈틈이 길을 걷고 책을 읽는다. 씨실을 이으며 날실을 보탠다. 


낮고 부드러운 음색의 첼로곡과 가습기에서 피어 오르는 촉촉하고 따뜻한 습기로 차갑고 메마른 공기를 어루만진다. 지금이 제철인 사과로 파이를 굽고 베란다에 있던 화분들 거실로 들인다. 마루 바닥에 털 달린 러그를 깔고 쿠션 커버도 바꾸어 주고, 오븐으로 군밤도 구워볼까. 천 원에 3개하던 붕어빵이 2개로 껑충 뛴 물가를 생각하면 온기가 절실한 어딘가에 작은 기부도 해야겠고. 한 해가 저문다는 아쉬움에 닿기 전에 이 계절을 늘려 도토리 모으듯 익숙하게 좋은 걸 쟁여야지.


매일의 일상에 소소한 이벤트를 더하면 쓸쓸함을 달래고 걱정을 덜어볼 수 있다. 가을이 빠르게 끝날 걸 한탄하는 대신 부지런히 물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보고 추운 겨울이 다가옴에 주눅드는 대신 생활 속에 온기를 더해보면 좋겠다.


목을 덮는 니트 위에 코트를 겹쳐 입는다. 옷은 조금 앞서갈 수 있지. 마음속 가을은 이제부터니까. 허물어져 가며 아름답고 비워지며 빽빽할 장면을 끌어안을 시간. 아직 남은 가을의 빛과 색, 낙엽 내음을, 깊어갈 어둠과 차가움을 품고 맑아질 숨을 들이마셔야지. 


계절마다 되풀이하는 행위로 위로를 주고 받으며 여름의 나무처럼 하루하루 삶의 빛을 모아간다. 불안과 걱정을 비껴갈 수 없더라도 성실히 내 자리를 지키며 공들여 사랑하자고. 오래된 원목 가구처럼 시간의 빛으로 짙어질 거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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