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Oct 18. 2023

존재의 순간들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



하늘이 높고 쾌청한 날이 이어진다. 뺨을 스치는 공기가 차갑게 바스락거린다. 여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한 고비를 넘자 가을로 성큼 걸어 들어가는 날씨. 나무들은 빠르게 옷을 바꿔 입고 거미줄에 걸린 거미는 커다랗게 몸집을 불렸다. 겨울 채비를 하는 존재들이 그리워했던 계절이 당도했음을 알린다. 




이맘때면 길상사를 찾는다. 결혼기념일 즈음하여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시기 번잡한 서울에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산사를 방문한다. 고즈넉한 경내에서 단풍 구경하며 계절 안에 머물기 좋은 곳이다.




아직 단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기와지붕 얹은 건물 사이로 숲길을 따라 걸으면 마음은 이내 정갈해지고 잔잔한 기쁨에 물든다. 군데군데 “이곳은 스님이 머무는 처소입니다”라는 팻말이 보이는 경내, 가장자리를 따라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진 풍경 안에서는 걸음이 느려지고 목소리가 낮아진다. 고요히 머무는 모든 존재를 자연스레 의식하면 아름다운 그것들과 조화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떠오르고. 곱게 걸음을 옮기며 나뭇잎 사이로 비어져 내리는 햇살을 눈에 담고 맑게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본다. 길가 벤치에 앉아 숲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와 남편은 차분한 경내 분위기에 흠뻑 젖어 보고 싶지만 어린 딸아이에겐 내키지 않는 일인가 보다. 아이는 지루한 듯 몸을 꼬다 장난을 치고 까불거리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자 하면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가려 버리고 조금 걷자 하면 괜히 딴청을 부리면서. 그런 아이가 못마땅하다가도 웃음이 번진 개구쟁이 얼굴을 보면 한없이 예쁘고 귀엽기만 하고. 팔랑거리는 몸짓과 재재거리는 목소리에는 꾸밈없는 다정이 깃들어 있으니.




작년에도 이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작년에는 저곳에서 사진을 찍었지. 길상사에 들를 때마다 찍었던 사진 속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년 전의 꼬꼬마 모습까지. 그 작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아이라는 형상은 매 순간 새 살을 돋아내며 새롭게 탄생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지나온 시간은 돌돌 말려 아이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아닌가, 아이 뒤로 대로처럼 과거의 시간이 뻗어 있는 걸까. 아이를 바라보면 자라온 시간이 그 뒤로 훤히 떠올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으니. 함께 걸어온 길이, 아이 등 뒤로 늘어뜨려진 과거라는 기다란 융단이 내 눈에는 보이는 듯하다. 





“그런 [기억 속의 어떤] 순간들은 여전히 현재의 순간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곤 한다. (…) 그럴 만한 분위기만 되면, 잊고 있던 추억들은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강렬하게 느꼈던 일들은 우리 정신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실제로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런 추억들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를 발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내게는 과거라는 것이 우리 등 뒤에 뻗어 있는 대로(大路) , 장면들과 감정들로 이어진 긴 띠와도 같이 보인다.”

<존재의 순간들>, 버지니아 울프 





길상사의 중심인 극락전을 마주 보고 왼쪽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 법정 스님의 처소에 잠시 머문다. 그리고 극락전 뒤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오른쪽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는 여정. 해마다 마주해 익숙해진 풍경인데도 그날그날 시선을 잡아 끄는 자리는 바뀐다. 언젠가는 왼쪽 오솔길 건너 작은 암자를 향하는 다리 근처의 풍경에 마음이 흔들렸고, 다른 날에는 법정 스님 처소로 들어가는 입구의 낮은 나무 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개나리가 늘어진 돌담에, 멀리 단풍 물든 풍경이 액자처럼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빈자리에 내려앉은 가을빛이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서. 가을빛 물들어가는 자리에 내 마음을 포개어 보고 싶었다. 내게 오는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빛을 더해 되비추는 거울같은 존재들. 그게 내 마음이려니 믿고 싶었나. 








그곳을 맴돌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가 장난을 치고 그러다 웃음이 터지고, 아이의 장난이 우리 사이로 옮아 놀이가 될 때까지. 돌아가며 포즈를 취하고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어 주면서. 그런 순간엔 우리가 돌담이나 풍경 조각이 된 듯, 허공으로 찬연히 흩어지는 웃음소리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고. 그러면 설령 이 순간이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동일한 장소를 반복해 찾아가는 사이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무언가를 기념하고 기뻐하는 의식. 의식이란 삶의 안녕을 기원하고 지나온 시간과 현재를 감사하며 기쁘게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사히 한 해를 살아 지난해처럼 여기 다시 올 수 있었음을 나를 둘러싼 세상과 함께 축하하는 일. 작은 가족 나들이가 하나의 의식이 되고, 우리가 통과한 시간을 기쁘게 돌아볼 수 있어 감사했다.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각자의 모습과 삶을 기억해 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









막 걸음마를 뗀 아이와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기억했다. 눈에 닿는 모든 걸 신기해하며 뒤뚱거리듯 걸음을 옮기던 아이. 스님의 염불 소리에 춤추듯 몸을 들썩였고 아빠 목말을 타고 함박웃음을 지었지. 작은 화단 앞에 나와 쪼그려 앉아 소꿉놀이도 했고. 그때의 나와 아이, 그리고 남편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기억은 가뭇없이 사라진 듯하다가도 어떤 순간 선명하게 떠올라 현재와 과거를 연결한다. 나는 이곳에 있으면서도 기억 속 그곳 어딘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순간을 연결할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 과거의 기억을 불러낼 수 있으니. 다행스럽게도 의식처럼 반복하는 일과 행동이 때로는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스위치 역할을 해준다.  




우리는 과거라는 순간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 있으면서 저곳 어딘가에도, 그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삶이라는 영화가 끝없이 돌아가는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소고기 뭇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