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만남과 응원
삶이 마련해 둔 뜻밖의 기쁨과 응원이 언제고 내게 알맞게 도착했다. 글로 또박또박 적을수록 그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니까 새해에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그럴 것임을 기억한다. 오늘도 응원하고 응원 받았던 과거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미래의 응원을 적어 나간다.
혼자 쓰는 글은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져 스스로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때가 많다. 쓰는 일은 나라는 벽 앞에 홀로 서는 일이라서. 그걸 감내해야 글을 완성할 수 있지만 과정에서도 홀로 인건 아니다.
지칠 때마다 나라는 벽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때마다 행운처럼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다. 소설가, 시인, 그림책 작가, 번역가, 편집기자와 그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과 연결되었다. 지난 가을엔 김연덕 시인이었다. 우연히 서울시민예술학교에서 시인이 진행하는 에세이 수업을 들었다.
글쓰기가 이끈 만남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와 에세이(일기 모음) <액체 상태의 사랑>을 읽고 시인을 흠모하고 있던 터였다. 시의 소재로 쓰인 촛불, 빛, 달빛, 눈과 돌, 나무 같은 단어가 나의 선호와 맞닿아 있어 매력적이었고 에세이에서는 ‘시’에 대한 시인의 순전한 사랑이 넘쳐흘렀다. 나는 무언가를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속절없이 빠져드는 사람이다.
에세이 수업은 매주 시인이 제공해 주는 여러 장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짧은 글을 써 가는 식이었다. 수업 당일 각자가 쓴 글을 수강생들이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면 시인이 전반적인 피드백을 갈무리해주었다. 모두가 좋은 이야기 뿐이었다. 이 단어가 놀랍고 저 문장이 마음을 울린다고. 그런 말들에 응원받는 기분이었다.
글쓰기가 처음이라는 사람부터 사진을 찍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시를 습작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림은 매번 달랐고 글의 모양새도 다채로웠다. 각자가 써 오는 글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찾아낸 매끈한 조약돌처럼 반짝거렸다. 진실되게 자신을 표현하면 모두가 훌륭한 글을 써낼 수 있음을 매 수업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년 간 블로그와 브런치, 인터넷 매체에 글을 써 왔으니 글을 좀 쓸 수 있다는 마음이 내 안에 있었나 보다. 조약돌처럼 단단한 참여자들의 글을 마주하며 나의 외연이 한꺼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내 글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 마음에 수업마다 나는 수축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이상하게 홀가분하면서 담대함이 찾아왔다. 아마도 시인이 소담하게 건네 준 칭찬 바구니 덕분일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열심히 배우고 처음인 것처럼 써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한 발 나아간 것 같다 가도 매번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 어쩌면 그게 글쓰기인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는 매번 처음의 자리에서 막막해지고 마는 일이다. 하지만 설렘과 맑은 기운으로 기쁜 것도,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으로 생동하는 마음을 마주하는 것도, 처음의 자리에서만 가능한 기분이다.
매번 처음에 앉아 자세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글쓰기가 새롭게 좋았다. 언제나 초보로 살자 생각하니 가뿐하게 즐거웠다. 잔뜩 먼지가 앉은 코트를 탈탈 털고 옷솔로 다듬듯 글쓰기라는 옷을 가다듬어 걸쳤다. 잘 쓰지 못하더라도 계속 쓰는 사람은 될 수 있겠다고.
계속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계속 쓰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계속해 시도하고, 실패에 덤덤해지고, 두려움 없이 내 문장들을 지울 줄 아는, 지우면서 더 많은 것을 써 나가는 사람이고 싶다.
170쪽, <액체 상태의 사랑>
시인이 에세이에 적었던 그 엇비슷한 마음이 내 것 같아 든든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글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환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남과 응원, 그리고 함께 쓰기
▲ 글쓰기 수업 시인을 초청한 글쓰기 수업에서 멤버들의 고유한 다름을 새롭게 발견했다. ⓒ 김현진
네 번의 수업이 끝나는 게 아쉬워질 무렵 시인을 초대해보자는 용기가 솟았다. 동네 도서관에서 글쓰기 동아리에 참여하고 있는데 올해의 마지막 지원금이 남아 있었다.
시인을 초대하여 수업을 진행한 덕분에 멤버들끼리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주제로 글을 써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글쓰기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멤버들이 고유하게 다르며 그동안 꺼내 놓지 못한 독창적인 언어를 내면에 품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해주었다. 그 생경한 낯섦이 오소소 좋았다.
동아리 사람들과 시인을 연결하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뜻밖의 노래가 흐르는 순간을 내가 사랑한다는 것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가교가 되어 점과 점을 연결하고 당신의 빛남과 당신의 좋음을 마주치게 하는 일, 그 사이에서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일이 나를 기쁘게 했다.
언젠가 ‘응원이라는 말을 사랑한다’(김선우의 시)고 따라 적은 적이 있는데 글을 쓰며 글 사이로 사람을 포개는 동안 그 문장이 진짜 나의 것이 된 것 같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다리가 되는 일이 응원이니까. 단정한 호의로 누군가를 만날 때 나는 그를 응원함과 동시에 응원받는다. 글을 쓸수록 응원이라는 말을 특히 사랑하게 된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열어 볼 수 없었던 문이 열린다. 누군가를 만나고 어떤 틈새를 들여다보고, 놓치고 말았을 사건과 감정을 알뜰하게 다시 겪는다. 우울해지고 좌절하는 나를 스스로 토닥이는 법을 배우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조금 더 정돈된 말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 간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걸 체험하고 실행하는 삶에 다가간다. 글이 나를 이끈다. 더 많은 사랑, 더 충실한 사랑으로.
그 이끌림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행운으로 이어졌다. 올해에는 특히 더 그랬다. 김연덕 시인뿐만 아니라 글이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을 사람을 달마다 만났다. 그러니 무너지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지. 계속, 하던 대로 쓰고 또 써야지. 그러다 누군가에 닿을 것이고 점이 아닌 선이 되고 도형이 될지 모른다.
홀로 쓰는 당신에게, 내 글에 의심이 들고 포기하고 싶어진다면 글 쓰는 타인을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쓰기는 혼자 하는 일이 맞지만 글로 향하는 길은 같이 걸을수록 풍성해지는 법. 누군가의 문장이 나를 쓰도록 움직였으니 한 번도 혼자 쓴 적이 없었다.
글을 계속 쓰고 싶고 글을 쓰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새해에도 나는 어딘가를 기웃거릴 것이다. 때론 그저 좋아하는 글을 좇아 누군가를 찾아가겠지. 글쓰기가 이끄는 기웃거림으로 빚어질 만남을 기대한다. 거기서 탄생하는 응원의 말들을 부지런히 채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