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이 문제
번역이 문제다. 번역이 일이라 먹고 살기 위해 중요하기도 하지만, 모든 게 번역에 달린 게 아닌가 싶어서다. 내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내느냐, 어떤 말로 옮겨내느냐에 따라 그 일의 의미와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도 한다. 어디에 중점을 두고 무엇을 가볍게 넘길지, 무엇을 힘주어 옮겨 적고 어떤 걸 툭툭 털어 버릴 지를 결정하니까. 언제부턴가 글쓰기가 삶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겪은 삶을 글로 번역하는 일. 몸과 정신이 느낀 것을 글로 옮기는 일. 삶에서도 번역은 중요하다.
반나절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일이 뜻밖의 문제에 걸려 길어졌다. 그런 일과 씨름하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고 신경이 온통 곤두서 버리고 만 저녁. 탁 풀어져 버리고 싶은데 아이의 끼니와 잠자리를 챙겨야 하니 조인 신경이 계속 조여왔다.
그런데도 아이 기분 따라 가뿐하게 저녁을 먹고 도서관까지 다녀왔다. 팔랑이는 아이 곁에서 그 에너지를 조금 얻은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 남은 기운을 다 써버린 건지 씻고 간단히 뒷정리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울 즈음엔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이번주에 마쳐야 할 일이 꽤나 많은데 며칠은 오늘처럼 가슴이 턱턱 막히겠구나 싶어서. 일에만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생활까지 챙겨야 하니 머리가 더 지끈거리겠구나 싶어서. 나도 다른 걱정 없이 내 일만 챙겨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한탄이 이어졌다.
급속도로 울적해지고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를 돌아보니 미운 구석만 도드라져 보였다. 일기장을 펼쳐 ‘힘들다’라고 적기 시작했더니 속상한 이야기만 이어졌다. 그걸 파고들다 보니 삶 전체가 절망적으로 보였다. 그런데 내 삶에 절망만 있는 건 아니었다. 힘들었던 하루에도 힘차게 웃었던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 다른 걸 기억해 보자고, 좋았던 걸 써 보자고 스스로에게 주문하고 싶었다. 나의 하루를 다르게 번역해 보자고.
‘무사히 마감을 지켰다’라고 적으니 '그래, 다행이야, 정말 애썼지, 잘했어, 수고했어'라는 말이 따라왔다. 피곤했던 하루가 금세 뿌듯한 하루로 바뀌었다. 내 안의 말을 바꾸자 하루의 빛이 달라졌다. 그러자 즐거웠던 기억이 따라오고 희망의 말이 길어 올려졌다. 다른 언어로 하루를 써 내려가자 반짝였던 순간이 보이고 글로 적어 기억하고 싶은 일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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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가로질러 도서관을 향해 이어지는 길은 가파르고 긴 언덕이다. 그 길에 최근 모노레일이 설치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단으로 오간다. 모노레일은 저녁 6시까지만 운행하는데 나와 딸아이가 도서관을 가는 시간은 대체로 식사를 마친 7시~8시 사이. 모노레일은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는데 딸아이도 은근 계단으로 오가는 걸 즐긴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며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긴 사람이 한 칸을 내려가는 대신 ‘주먹은 다섯 칸, 가위는 열 칸, 보자기는 열다섯 칸’이라는 규칙을 사용해서. 그런데도 계단이 많기도 많아 놀이는 한참 이어지고. 그런데도 놀이에 열중하다 보면 금세 계단 끝에 다다른다.
“안내면 진 거(술래~), 가위 바위 보!” 였던 구호가 요즘은 “안내 빠찌, 강낭콩!”으로 바뀌었나 보다. 익숙히 알던 그 리듬에 아이들이 저희 입에 맞게 줄여 놓은 구호가 찰떡같이 붙는다. 구호 따라 가위바위보를 골라냈는데 승부가 나지 않으면, 구호는 이렇게 반복된다.
“안내 빠찌, 강낭콩!, 강낭콩! 콩! 콩! 콩!”
‘콩!’에 맞춰 다시 손을 내고, 다시 손을 내고. 그러다 보면 가위바위보를 하기 위해 구호를 외치는 건지, 구호를 외치려고 가위바위보를 하는지 분간할 수 없는 기분이 된다. “안내 빠찌, 강낭콩! 강낭콩! 콩! 콩! 콩!”하는 말이 짧은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오면 어찌나 경쾌한지 입안에서 구슬을 굴리는 것 같다. “콩! 콩! 콩!” 그렇게 통통통 튀는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그 리듬으로 또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순전히 그 노래를 부르고 싶어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 게 아닐까 싶고.
우리는 놀이를 할 때마다 반칙을 한다. 주먹에 다섯 칸, 가위에 열 칸, 보에 열다섯 칸. 이긴 사람이 겅중겅중 내려갈 때마다 뒤에 남겨진 사람과의 거리가 상당히 벌어지는데, 가로등이 밝혀져 있어도 어두운 길에 홀로 서 있는 게 무서운 아이는 이긴 사람이 계단을 내려갈 때 뒤따라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오기 때문. 그런 아이를 보고 나도 아이가 이기면 몰래 계단을 넘어 내려가고. 그렇게 반칙을 눈감아 주는 대신, 이긴 사람보다 더 많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걸 암암리에 지킨다.
어떤 때는 아예 나란히 손을 잡고 내려간다. “안내 빠찌, 강낭콩!” 가위바위보는 하지만,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누군가 주먹으로 이기면 둘이 손을 꼭 잡고 같이 다섯 칸을 내려가고, 가위로 이겼다면 손을 꼭 잡고 열 칸을 내려간다. 이때엔 계단 위로 달려 나가는 발의 방향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어제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도 “안내 빠찌, 강낭콩, 콩! 콩! 콩! 콩!....”하며 끝없이 가위바위보를 하며 걸었다. 노래를 부르는 게 좋아서 계속 부르는 사람들처럼. 혹은 빨리 도서관에 도착하게 해 주세요, 하는 주문을 외는 것처럼. 그러느라 내가 주먹을 내는지, 보자기를 내는지 분간할 수 없는 속도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아이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어 손에 쥐가 날 것 같다가,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에도 손가락 관절이 저릿해 오다가, 그러다가도 와르르르 웃음이 쏟아졌고.
돌아오는 길에도 우리는 “안내 빠찌, 강낭콩”을 열심히 부르고, “해바라기씨!” 놀이를 하며 공원을 가로질러 뛰었다. 공원 중앙의 둥근 잔디밭에 다다르니, 왼편 하늘 위로 동그랗게 노란 달이 예쁘게도 걸렸더라. 내가 달을 어여쁘다 바라보는 것처럼, 너도 참 예쁘다, 달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고. 올망졸망 꽃이 핀 매화나무 아래에선 꽃향기가 어찌나 진하던지. 그 아래 서서 아이에게 와보라 손짓하며 “엄마가 꽃 향수 뿌렸다!” 우스갯소리를 했다. 코를 킁킁하던 아이가 외쳤다. “바나나킥 냄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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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빠찌, 강낭콩! 콩! 콩! 콩!” 주문처럼 외워본다. 이번주엔 마감이 임박한 일감으로 어깨가 무거운데, 답답함을 다독이며 일을 해야 할 텐데. 머리에서 쥐가 나는 순간 이 주문을 한 번 외워봐야겠다. 머리가 지끈 거리다가도 “콩! 콩! 콩!”하는 경쾌한 외침에 지끈거리던 두통도 흩어지지 않을까. 혼자 중얼거리다 그런 자신이 우스워 개구쟁이처럼 웃어버리지 않을까. 사는 게 이런 건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외우며, 반칙도 좀 하면서, 그러는 사이 저마다의 규칙이라는 것도 갖추게 되는 일. 달 보고 꽃 보며 와르르르- 웃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한 일인지도.
그러니 못 하겠다고 손을 놓아버리는 대신 반칙을 조금 하더라도 살아내기. 다 소용없다고 절망하는 대신 내가 해낸 것, 버틴 것에 잠잠히 손뼉 쳐 주기. 그러면서 이왕이면 조금 더 기쁘게 살아내기. 마른 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꽃송이처럼 작고 귀여운 즐거움을 알아채면서. 어제 당신을 활짝 웃게 했던 일은 무얼까, 문득 궁금해진다.
내 삶을 적는 말을 요리조리 돌려본다. 이 말을 꺼냈다, 저 말을 덮어 보고, 저 단어를 썼다, 이런 단어로 훌쩍 건너가 본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삶의 빛이 달라진다. 내가 옮겨 적는 말과 기분을 타고 삶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