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May 15. 2024

봉인

언어의 발견



얼마 전 구례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때 산 아래 작은 가게에 들러 유리 문진 하나를 손에 넣었다. 투명에 가까운 살구빛 분홍색이 감도는 판유리 다섯 장이 겹쳐진 사이에 홍매화 두 송이가 납작하게 잠들어 있다. 그 매화는 올봄 선암사에 피었던 거라고 뒷면에 붙은 스티커에 정자체로 적혔고. 한순간 피었다 지고 마는 꽃과 투명하게 빛나지만 단숨에 깨질 수 있는 판유리의 조합, 두 개의 아스라한 것들의 만남은 어떤 간절함의 축적 같다.


사라질 운명의 것을 포개 하나의 성을 지은 작가의 마음이라니. 연약한 두 대상을 맞대 견고하게 가두고자 했던 마음은 무얼까. 유리로 봉인한 홍매화의 마음이랄까, 유리와 홍매화로 봉인한 작가의 마음이랄까, 그것들이 손 안에서 애틋했다.       


    

요즘 딸아이는 왁스실링에 빠졌다. 왁스실링이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에게 색색깔의 왁스가 들어있는 상자와 도장 세트를 선물해 주었다. 작은 알약처럼 생긴 왁스 조각을 금장 도금된 작은 스푼에 담고 촛불에 녹인다. 그런 다음 작업판 위에 붓고 도장으로 찍으면 여러 가지 색이 마블링된 왁스 위로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다.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만 기억하던 밀랍 대신 아이에겐 알록달록 고운 색의 여러 가지 왁스 조각이 있고, 눈꽃, 천사, 나무, 잎사귀, 꽃, 글귀가 새겨진 열 개의 도장이 주어졌다. 찍을 때마다 예측불가능한 색의 혼합 위로 도장에 새겨진 무늬가 옮겨간다.    

   

“엄마 왁스실링 만들까?”     


시큰둥하게 아이 곁에 앉았던 나는 실링 만들기의 은근한 재미에 발을 담갔다. 귀여운 스푼에 왁스 조각을 담아 촛불로 녹이는 동안, 작업판 위에 부어 적절한 세기로 도장을 지그시 누르는 동안, 오가는 기다림과 잠잠함이 좋다. 비슷한 색을 섞어도 매번 달라지는 결과물, 거기에 도장의 선택에 따라 또다시 변모하는 실링. 선택의 망설임과 뜻밖의 탄생을 마주하는 일 모두 신선하다.      


왁스가 서서히 녹아들어 갈 때 핀셋으로 누르면 구름처럼 몽글몽글하고 그걸 작업판 위에 부어 도장으로 찍을 때는 손 아래에서 부드러운 액체성이 고체성으로 바뀌는 걸 감각할 수 있다. 도장을 쥔 손에 적당한 힘을 가하면 녹아 있던 왁스 위로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가다 혹은 스며들다 단단하게 닿는 지점에 멈춘다. 십여 초 사이 미세하게 손끝에서 변하는 촉감. 없음에서 있음으로 변모하는 찰나의 감각은 신비롭고 마술적이다. 그러는 사이 도장에 새겨져 있던 무늬 혹은 글귀는 왁스 표면에 포획된다. 왁스는 도장의 무늬를 사로잡아 자신 안에 가둔다.       


왁스 실링(wax sealing), 이는 왁스로 종이봉투의 열리는 부분을 고정하거나 개방된 부분을 감싸 덮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녹은 왁스에 도장을 찍는 행위 자체도 ‘sealing(봉인)’을 내포한다. 도장의 무늬를 왁스 안에 가두어 넣음으로. 왁스를 녹이면서 어떤 무늬를 찍을까 고심하게 되는 건, 한 번 사로잡힌 무늬는 다시 빼낼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늬를 찍은 왁스를 다시 불에 녹이기 전에는, 내가 새겨 넣은 무늬는 동그란 왁스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그러니 도장을 찍는 행위에는 변하지 않길, 영원히 머물길 바라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담긴다.      


먼 옛날 사람들은 특정한 사람을 향해 비밀스레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오직 그 사람에게 닿길 바라 편지 안에 적고 봉인했다. 모두에게 열린 봉투를 오직 한 사람을 향해 한정했다. 때로는 그 안에  불멸의 약속을 담았을 것이다. 고백하는 이의 이니셜이나 표식이었을 무늬를 새겨 봉인으로 그 자신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일부를 그 안에 새겨 넣었다. 그것이 마음이기라도 하다는 듯 왁스 위와 아래에 가두었다. 그러니 봉인, 왁스 실링의 형상은 그 행위의 의미와 긴밀하게 닿아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꽃이나 잎사귀, 눈꽃 같은 모양보다, “For you”나 “Thank you”처럼 글이 새겨진 도장을 찍는 게 더 좋다. 도장에 새겨진 글씨체가 오래전 편지에 적혔을 법한 유려한 필기체여서. 도장을 찍을 때면 소중한 이들에게 편지를 쓰던 기분이 되살아나기도 해서. 내 마음을 도장으로 왁스 위에 새겨 넣는 기분이랄까. 마음을 이처럼 어딘가에 꾹 눌러 찍어 둘 수도 있을까. 없음에서 있음으로 드러나는 왁스 위의 마법처럼, 순간의 마음들 도장처럼 찍어 간직할 수도 있을까.       


판유리 사이에 가둬진 홍매화를 보다 ‘봉인’을 떠올렸다. 편지에 봉인을 찍는 이가 순간의 마음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려 했던 것처럼, 유리는 홍매화의 마음을 자신 안에 봉인했을 거라고.  


마음에 마음이 맞닿으면 영원을 꿈꿀 수 있다. 유리 문진을 가만히 쥐고 있으면 선암사 뒤뜰에 다소곳이 피어오르던 홍매화가 내 안에서 살아난다. 어느새 머릿속에서 선암사의 홍매화를 그리다 유리의 마음에 닿는다. 사라지는 것을 내내 비추고자 했을 유리의 마음을. 문진 안에는 매화의 마음만이 아니라 유리의 마음도 봉인되었다고. 매화를 품고 외롭지 않을 유리와 차갑도록 따뜻한 유리 안에서 꼿꼿할 매화. 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획한 사람처럼 환해진다.    

  

찰나에 흩어져 버리는 대상을 유리 안에 봉인한 작가의 간절함을 내가 알아챘듯, 유리는 매화의 고결한 마음을 알아챘을까. 아니면 매화가 유리의 투명한 마음을 알아챘을까. 무엇이 무엇의 마음을 알아챈다는 건 왜 이토록 애틋한지.     



“글쓰기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 글쓰기는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망각의 고통에 맞서기 위한 행위다. 스스로 절대적인 것이라 공표하는 망각. 오래지 않아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어디에도 없고, 그 누구도 모르게 되는 것.”

-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그러고 보니 나는 날마다 글쓰기로 어떤 마음을 ‘봉인’하고 있었다. 연약한 것들, 사라지기 쉬운 것들, 깨지기 쉬워 쉬이 내뱉을 수 없는 것들을. 희미해질 것이 두려워 고정시켜 두고 싶은 것들을.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나를 낮추려는 마음, 무용의 의미를 헤아리고 표면 뒤에 숨은 걸 알아보려는 마음, 사소한 기미에 연연하며 섣불리 결론을 짓거나 경계를 세우지 않으려는 마음, 그렇게 망설이며 삶의 우선순위를 다잡으려는 마음.


시간과 기억, 어떤 마음들을 봉인을 찍듯 글 안에 가둔다. 망각의 고통에 맞서기 위해, 계속해서 상기하기 위해 적고 또 적고...봉인하고 또 봉인하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