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없습니다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일을 들고 아침 일찍이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어제 내린 비가 그쳐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맑은 빛이 들이치고 초록이 짙어가는 나무들이 바람에 일렁였다. 그 길에서 아직 선명한 흰색으로 나무 위에 떠 있는 산딸나무의 꽃들이 나를 반겼고. 발걸음을 멈춰 그 앞에 섰다. 끝없이 풀어지는 실처럼 가느다란 바람이 대기 중에 흐르고 나뭇잎과 꽃은 바람의 물결에 거스름 없이 자신을 흔들었다.
나뭇잎과 꽃의 움직임으로 보이지 않는 바람의 진동을 알아볼 수 있었다. 좁은 폭으로 위아래로 움직이는 작지만 선명한 떨림. 외부의 움직임이 자신을 스쳐도 아무런 낌새를 내비치지 않는 것이 무심이라면 바람에 떨던 나뭇잎과 꽃은 유심. 바람을 듣느라 온몸을 기울이며 그 흐름에 기꺼이 동참했다. 내내 그렇게 연연하겠구나. 다가오는 온갖 미세한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자신을 키우겠구나. 유심이 많아 다심하겠지. 어느새 잔 떨림에서 자잘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때로는 번역에 들이는 시간이 어떤 나를 잠들게 하는 시간 같다. 자유롭게 풀어주던 생각을 눈앞의 문서에 집중시키고 거기 담긴 내용 안에 나를 가두느라. 기술적인 언어와 내용, 기계적인 번역. 일정한 시간을 묵묵히 갈아 넣어야 하는 일. 그러느라 생각은 한없이 좁아지다 앉아 있던 시간만큼 굳어진 몸처럼 영혼도 딱딱해지는 기분이다.
글을 쓰는 일이 삶과 세상을 번역하는 일이라고 썼지만, 실질적인 ‘번역’은 창작과는 전혀 상관없지 않은가 싶다. 문학적인 글을 번역한다면 그 일에 창작의 영역이 포함되겠지만 기술적인 문서를 번역하는 내게 요구되는 건 처음에도 정확성, 마지막까지 정확성이고. 언어의 사용에 정확성이야말로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일을 하며 깨달았지만. 일에 시간을 쏟을수록 창작의 열린 상태와는 멀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자란다.
“이제 스피커에서는 그의 음반에 수록된 <Everything Happens to Me>가 들립니다. 해석에 따라 그 어감이 달라지지만, 나는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난다고. 그럼 내가 하는 일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뒤, 그게 무엇이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천천히 헤아리는 일. 배경은 내 마음속 오래된 얼음. 녹지 않은 채로 늘 눈이 쌓여 있는 곳에 한 피아니스트가 그랬듯, 나도 이 세상에 들려주고 싶은 내 음악을 혼자 생각합니다. 겨울의 여느 때 같이 내리는 눈을 마치 처음 내리는 눈처럼 여기며, 세상의 것을 즐거워하고 귀여워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소리를 바탕으로 나만의 선율을 지어 나만의 재즈를 연주하고 싶습니다. 찰리 파커가 한 것처럼 매 순간마다 새로운 음악을. 나도 언젠가 그 누군가를 오랫동안 춤추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니 그때까지 날품이고 달품이고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겁니다. 일단은 잘 살아 있어야 그게 가능하니까. 아마 이번 달도 방세를 내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얼마 없겠지만, 문제없습니다.”
<선릉과 정릉> 전욱진, 난다, 76~77쪽
전욱진 시인은 <선릉과 정릉>의 한 꼭지에서 듀크 조던의 이야기를 풀었다. 듀크 조던은 1940년대 찰리 파커의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지만 60년대 로큰롤의 대두로 재즈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잇따른 불운을 겪고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사이 생계유지를 위해 택시 운전을 하느라 십 년이 넘는 동안 녹음실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1973년 뒤늦게 유럽에서 미국 재즈 붐이 일면서 덴마크 재즈 애호가 단체의 초대를 받아 공연할 기회를 갖게 된 듀크 조던은 마침내 재기 앨범을 내는데, 그것이 바로 <Flight to Denmark>다. 재즈를 즐겨 듣지만 좋아하는 해외 뮤지션의 이름과 음반을 외우고 꼽는 데엔 자신이 없는 나조차도 종종 즐겨 듣는 음반 중 하나. 전욱진의 글에 따르면 한 라디오 프로에서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음반으로도 소개되었단다.
그 음반에는 ‘No problem’과 ‘Everything happens to me’라는 곡이 있는데, 두 곡에 대한 전욱진의 글이 좋다. 음악은 음악대로 두말할 나위 없이 빼어나지만, 십 년이 넘도록 택시 운전을 하며 때를 기다린 듀크 조던이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을 거라는 ‘No problem(문제 없어)’,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난다고, 그럼 내가 하는 일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 뒤, 그게 무엇이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천천히 헤아리는 거라는 ‘Everything happens to me', 시인의 해석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긴다.
언젠가 듀크 조던처럼 자신만의 선율을 지어 들려주고 싶다는 시인은, 듀크 조던이 시간을 견디는 사이 그 자신에게 했던 말을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며 그때까지 잘 살아있자고 다독인다. 날품이고 달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수중에 돈이 얼마 없더라도 문제없다고. 그러니까 그는 음악과 시를 향한 사그라들지 않을 사랑을 품고 내내 기다리겠다고 적는다. 기다림으로 어딘가로 다가갈 것을 믿는다.
내게도 모든 일이 일어난다. 하루에도 온갖 것들이 나를 스치고 스며들고 때로는 관통한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돌릴 수도 순순히 나를 맡겨 온몸을 떨 수도 있다. 흔들리지 않으려 몸을 꼿꼿이 세우다 울상이 되어버린 적이 있는 나는, 이제 흔들리는 쪽을 택한다. 가능하다면 그 모든 일에 유심과 다심으로 다가가 받아들이고 싶다. ‘No problem’ 하면서 그것들 내게 들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천천히 헤아려 보고 싶고. 그러니 차라리 ‘Everything happens to me’이길.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 있다는 시인의 마음을 닮아간다.
산딸나무의 하얀 꽃과 연둣빛 잎사귀가 그 시인의 마음을 일깨웠다. 스치는 일들에 연연하며 그걸 품어 자신만의 선율을 빚는데 충실한 이. 당장이 아니라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무르익길 기다리는 이. 그러기 위해 날마다 날품과 달품을 팔며, 절망하고 좌절하는 대신 손톱과 발톱, 귀 뒤를 깨끗이 하며 팔꿈치 에 로션을 바르는 이. 자신과 생활을 정돈해 세상의 것을 즐거워하고 귀여워할 준비를 하는 이를. 나도 그러자고, 그러고 있다고, 어딘가 나와 같은 이가 있어 기쁘다고 산딸나무 꽃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일을 할 때는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을 준비한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험에 대해 배우고, 그렇게 다음 작업을 위한 혹은 언젠가 어떤 일이 생길 때 요긴할 참고 지식을 배우자고. 고등학교 시절 수학 정석을 반복해서 풀던 마음처럼. 요행을 바라지 않고 숙달을 위해 굳은살을 새기듯이. 그때도 믿었고 지금도 믿는 마음으로 어떤 시간을 건넌다. 그런 내 곁에 택시를 몰던 듀크 조던과 생계를 위해 일하는 시인이 있다.
이것이 나의 날품이고 달품이고, 일단은 매일을 잘 살아보아야지. 틈틈이 내가 받아들인 것들 무엇이 될 수 있나 천천히 헤아리면서. 그렇게 무사히 마감을 맞췄으니, “문제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