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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Jun 19. 2024

삶에 기댈 것

언어의 발견





전날 밤부터 인후통이 심했다. 온몸의 관절에서 여진처럼 통증이 번졌다. 몸살감기구나. 다음 날 백건우 연주회를 보러 용인까지 가야 하는데,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그런 예감이 든 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몸이 아프니까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다시 가늠하고 일정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느라 업무용 이메일을 훑어보다 아직 회신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일이 이미 내게 배정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으니. 일주일 분량의 일이었는데 마감까지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약을 먹더라도 무리해서 가볼까 했던 백건우 연주회 관람 약속은 눈물을 머금고 취소하고 아침 일찍 서둘러 병원을 다녀왔다. 아픈 몸을 다독여 일에 집중해야 한다.


몸살감기와 인후통, 고대했던 음악회의 취소, 일주일 분량의 일을 이틀 안에 끝마쳐야 한다는 압박감. 감기는 불행의 전주곡인 것 같았지만 나를 구한 다행의 미덕이라고 믿기로 했다. 불길한 예감에 불현듯 이메일을 뒤적여 마감이 코앞인 일감의 존재를 알게 해 주었으니.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천만다행이다.


시간이 부족했다. 글자 당 초초분분 꼬박꼬박 매겨 넣어야 하는 일이라서. 요행이나 술수가 통하지 않는 정직한 일이라서. 그래서 좋아하지만 그래서 이런 날 힘들다. 시간이 터무니없이 모자라게 느껴질 때 짧은 시간만큼 숨이 타들어 갈 때. 그건 해보지 않고 미리부터 하는 걱정이기도 하다. 어떤 순간엔 손가락과 머리에 날개가 달려 초초분분 매기지 않고 훌쩍 문장을, 문단을 바꾸어 내기도 하니까. 그런 순간에 올라타면 시간은 모래알처럼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멈추고 흩어지며 비정형으로 움직인다. 걱정할 사이에 한 자라도 더 번역을 한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기회를 노린다. 그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스스로가 열렬히 믿어준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압박감 때문에 털이 곤두선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고. 이럴 때 남편까지 일이 많아 반쯤 다른 세상에 가 있는 사람처럼 허정거렸다. 아침마다 정성껏 매만지는 머리가 흐트러져 있다는 건 그만큼 고심했다는 뜻. 김밥과 떡볶이를 주문해 아무 일 없는 사람들처럼 저녁을 먹었다. 음식에서 눈을 떼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남편의 눈이 보였고. 나의 눈도 그랬을까.


계획보다 넘치는 분량을 해낸 후에야 조금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늦은 저녁, 우리 집에 두고 간 지우개를 돌려주겠다며 놀이터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딸아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뜨듯한 유월의 바람이 불었다. ‘여름이구나!’ 바람의 모서리가 허물어졌다.


지우개는 핑계였다는 듯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줄넘기를 하며 이어달리기를 했다. 조합놀이대 주변을 한 사람이 뛰어 돌아오면 기다리고 있던 다음 사람이 뒤이어 달려 나가길 반복했다. 그러느라 줄넘기 줄과 발바닥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간간이 터져 나오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꽉 막힌 듯 느껴졌던 하루가 새롭게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네모난 색종이의 사방을 접어 손가락에 끼워 ‘동서남북’ 하면서 접었다 펼쳤다 하는 놀이처럼. 손가락을 한 번 벌리면 숨어 있던 면이 나타나듯 삶의 완전히 다른 면이 열렸다. 잔잔한 호수 위로 돌멩이가 던져진 듯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죽은 듯 멈춰있던 박동이 다른 리듬으로 움직였다.


삶이란 납작하지 않고 내가 보는 것 너머로 더 많은 장면을 숨기고 있다. 무궁하고 변화무쌍한 주름들이 겹겹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돌리면 삶의 또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시선과 몸을 조금만 돌려도 세상은 활짝 펼쳐진다.


불행을 다행으로 돌려 읽고 피곤했던 하루를 물방울처럼 부서지는 웃음을 보았던 하루로 바꿔 읽는다. 손가락에 끼운 ‘동서남북’ 종이 접기처럼 접었다 펼쳤다, 접었다 펼쳤다, 그렇게 삶의 다른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아이들의 달음박질이 가슴으로 뛰어들어 왔다. 반쯤 죽은 사람처럼 삶에 맞서고 있었는데 그제야 자세를 바꿀 수 있었다. 삶에 기대는 게 더 낫다고. 어딘가 무리하고 있는 거라고 신호를 보낸 몸살감기처럼, 내 앞의 일에 성실하라고 삶이 나를 책상에 붙들어 놓는가 보다. 저항하지 말고 유순하게 삶이 흐르는 일에 기대면 될 일이다. 세끼 잘 챙겨 먹고 약을 먹고 할 수 있는 일 착실히 하면서. 지나치게 먼 곳, 아직 오지 않은 먼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아이들 줄넘기 소리가 가벼운 심장박동소리 같았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리듬감 있게 달리는 아이들 뒷모습은 날갯짓하는 새를 닮았다. 아이들은 언제나 날아오른다. 삶의 무게에 맞서지 않고 전적으로 기댄다. 기대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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