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발견
2021년 여름과 겨울, 신유진 작가님의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을 통해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아니 에르노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신유진 작가님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이미 그를 좋아하던 때였다. 그의 책에 담긴 이야기는 작가만의 내밀한 삶이었는데 거듭 내 안의 기억과 사람들, 장소를 환기시켰다. 있는지도 몰랐던 어떤 조각들이 일순간 떠오르곤 했다. 당시의 나는 바라는 게 없는 조금은 무기력한 상태였는데,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슴이 뛰었다. 내 안의 이야기가 글을 될 수 있다는 걸 신유진 작가님이 알려주었다.
작년 여름부터 출판을 위한 책을 준비했다. 책의 기획이 바뀌면서 원고를 여러 번 다시 썼다. 거기에 출판사의 사정이 더해져 일의 진척이 더뎠다. 시간이 흐를수록, 글을 쓰면 쓸수록 글에 대한 의심과 불확신이 자라 힘들기도 했는데. 그 모두를 지나 보니 시간 덕분에 무르익은 것도 보인다.
'최종교'라는 이름으로 파일을 주고받으면서 진짜 책이 세상에 나온다는 게 실감이 났고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 글이 책으로 나올 만한 걸까?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 마지막 수정이 어려웠다. 영원히 끝낼 수 없을 것 같으면서, 이대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속 마음을 들키고 싶으면서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순된 마음처럼.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문장의 답답함과 할 수 없을 것 같은 중압감에 짓눌리다 간신히 최종교를 넘겼다.
(물론, 또 다음의 최종교가 올지 모르지만,)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다. 기차표를 예약했다. 어디든 훌쩍 가보는 일탈을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일탈의 목적지는 ‘르물랑’. 신유진 작가님의 반려인 마르땅님이 운영하는 익산의 카페다. 나의 아빠의 고향이기도 한 익산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내가 태어난 고장이기도 하다. 살아본 적 없는 고향이라는 모순이 알아내야 할 비밀을 품은 듯도 하고. 고향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으니 내게 그 고장은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 같은 이미지다.
중앙 시장 근처에 있는 르물랑은 찾기 쉬웠다. SNS에서 얼굴을 보아 익숙하게 느껴지는 마르땅님이 우리를 맞았다. 작가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고 카페 안을 살펴보았다. 주문한 커피와 디저트, 아이를 위해 마르땅님이 특별히 내어준 아이스크림이 나오고. 맛있다고 감탄하며 복숭아 타르트를 먹는데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작가님이 돌아오신 거다. 우리를 보며 반가워하는 작가님의 모습을 보니 단번에 긴장이 풀렸다. 작가님은 망설임 없이 의자를 끌고 와 곁에 앉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셨다. 들으려는 사람이 되어 호기심과 기쁨으로 눈을 빛내셨다. 환대를 환대로, 기쁨을 기쁨으로, 다정을 다정으로 고스란히 표현하는 사람.
자신 없고 걱정되는 마음이 앞서는 나를 작가님은 ‘쓰는 사람’으로 대해주셨다. 그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쓰는 사람’으로 기쁘게 모든 것을 맞으면 되겠구나 싶었다.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가요,라고 작가님은 말씀하셨다. 그 말을 타고 나는 이미 ‘쓰는 사람’이고 앞으로도 쓰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확신이 건너왔다.
“많이 쓰세요. 무엇이 될지 생각하지 말고 많이 써서 쌓아두세요.”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좋은 글인지 그렇지 않은지, 그런 의심과 고민은 삭제되었다. 많이 쓰라는 말씀은 계속 써도 좋다는 또 다른 허락이자 격려였으니. 안심이 되었다. 글을 의심하는 대신 많이 쓰자고 자신을 북돋았다. 쓰기에 쓰기가 덧대어져 믿음은 더욱 굳건해질 거라고. 쓰다 보면 어딘가에 다가가 있을 거라고. 내 안의 이야기들이 출렁였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 허락을 넘어선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처럼 한없이 다정한 환대를 건네고 싶다. 계속 쓰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길 것이다. 내 뒤의, 혹은 옆이나 앞의 누군가에게 문을 열어주는 일. 글쓰기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맞이하는 일인가 보다. 나 너머의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고 팔을 벌리는 일이다. 경계를 풀고 팔을 벌려 두려움을 기쁨으로 맞는 일. 작가님에게 배운 것처럼 내 앞에 다가오는 것들 고스란히 끌어안고 싶다. 쓴다는 건, 삶을 쓴다는 건, 기꺼이 삶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일이니.
르물랑을 나와 딸아이와 함께 중앙 시장을 구경했다. 세 개 천 원하는 찹쌀 도넛을 사 먹고 딸아이는 한 개 사 천 원 하는 매니큐어를 세 개나 샀다. 매니큐어가 든 병은 뚜껑에 커다랗게 반짝이는 보석을 달고 아이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서울보다 가격이 싸고 색도 다양하다며 아이는 신이 났고. 집에 돌아가면 샤워하고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자고 대화하는 사이 피곤이 잊혔다.
익산에서 우리는 신유진 작가님의 책에 등장할 것 같은 당차고 따듯한 이모들도 만났다. 기차역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들어간 칼국수집은 만석이었는데,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나와 아이를 보고 한 이모는 여기는 항상 이렇다고, 그래도 금방 자리가 난다고 살갑게 말을 건네셨다. 또 다른 이모는 "애기 엄마가 기다린다"며 같이 식사하는 일행을 부추겨 서둘러 식사를 하고는 자리를 비켜 주셨다. 화장품 가게 이모는 딸아이가 작은 지갑에서 꼬깃하게 접힌 지폐를 한 장씩, 한 장씩 꺼내는 걸 기다려주며 사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계산한다며 기특해하셨고. 이런 이모들을 만나면 든든하다. 서로를 환대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걸음은 용감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익산역에서 쫀드기 한 상자를 샀는데 기차에 두고 내리고 말았다. 익산에 다녀오면 무언가를 얻을 줄 알았는데 실은 무언가를 잃은 걸까. 하지만 무언가를 얻는 일은 잃는 것과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얻음으로 '알지 못함'의 상태를 잃고 잃음으로 '알게 됨'의 가능성을 얻듯이. 무엇보다 상실은 그리움을 싹트게 한다. 릴케는 상실이 소유를 확인해 준다고 했던가. 그곳에 내 것이 분명한 그리움을 심어 두었다. 속상해하는 아이에게 다시 갈 이유가 생겼다고 속삭였다.
카페의 작은 책방에서 구입한 <상처 없는 계절>을 펼쳤다. 이 구절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 식탁 앞에서 첫 책의 첫 문장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온 힘을 다해 몇 시간 끝에 겨우 한 줄. 그날 그 한 줄을 쓰고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더랬다.
“나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쓸 수 있는 사람,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상처 없는 계절> 신유진, 197쪽, 마음산책
말에도 온도가 있다면 이 단어로 내 몸은 온기를 찾았다. 쓸 수 있는 사람. 온몸을 꽉 채우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