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은 끝없는 '되어 가기'

by 춤추는바람



귤이 놓인 방은 금세 환해진다. 귤이 품은 해를 닮은 빛깔 때문이다. 귤의 꼭지 부근에 엄지 손가락을 찔러 넣으면 향주머니가 터지듯 단숨에 번지는 산뜻한 향 때문이다. 색과 향 때문에 귤 앞의 나는 귤을 만나기 전의 내가 아니다. 귤빛을 흡수한 뇌는 체온을 미세하게 높이고 귤향을 맡은 신경은 잠들어 있던 온몸의 감각을 깨운다. 입안에 침이 돌기 시작했으니 귤을 먹기도 전에 나의 상태는 변한다. 귤의 신맛에 나는 또 한 번 놀란다. 한없이 둥글고 향긋한 과일이 숨기고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맛에.


지금 내 앞의 귤은 익히 알던 그 귤이 아니다.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아도 느껴지지 않는다. 껍질이 긴장감 없이 늘어진 걸 보니 과숙한 탓일까. 지난겨울 귤 농장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귤은 덜 익어 초록빛일 때 가장 시지만 가장 많은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다고. 익으면 익을수록 단맛이 강해지지만 비타민은 줄어 영양가 없는 귤이 된다고. 요즘 사람들은 지나치게 당도가 높은 귤을 선호한다던 농장 아저씨의 말. 껍질을 벗겨 한 알 입에 넣었다. 달다, 달고 달고 달다. 새콤이 아니라 달콤만 품은 귤. 이건 내가 알던 귤이 아닌데. 귤의 신맛 때문에 사과를 더 좋아했지만, 그런데도 귤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새콤함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귤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과일이 되었다.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단어가 '귤'이었다. 엄마, 아빠, 맘마, 쭈쭈 같은 의성어에 가까운 단어를 제외하고, 아이가 최초로 정확하게 발음한 단어다. 그때 아이는 연보라색 내복을 입고 목마에 올라타 한쪽 다리를 흔들며 한 손으로는 귤을 입에 넣어 오물거리고 있었다. "뭐 먹어요?"라는 나의 질문에 아이는 작은 입술을 힘껏 모아 말을 지었다. “뀨울~, 뀨울~!”


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또 하나의 계기가 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귤 따기 체험을 하면서다. 나무에 매달린 주황빛 귤을 손수 따면서 진짜 귤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 먹는 귤이 가짜는 아니지만, 우리가 귤을 먹으며 매 순간 이건 진짜야,라고 각성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귤이 나무에 매달린 모습을 눈으로 보고 나뭇가지에서 잘리는 감각을 손으로 느끼고, 나무의 열매인 귤 하나를 손에 쥐었을 때 알아채는 '이건 진짜야!'라는 감각. 그 온전한 물성은 마트에서 사 먹는 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짜라는 느낌은 살아 있음의 총체적인 일차 감각이라고 한 심리학자는 말했다. 나무에서 갓 딴 귤은 직전까지도 살아 있던 귤, 그야말로 진짜였다.


나무에서 갓 딴 귤에서는 ‘수확’이라는 단어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수확이라는 말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았다. 바람과 햇살과 토양과 농부의 시간과 땀이 모여 귤이 되었음이 만져졌다. 귤 따기 체험은 귤을 따는 체험이자 귤을 이루는 요소, 귤이 만들어지는 과정, 즉 귤이 됨을 체험하는 일이었다.


무엇이 되는 일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을 요하며 무언가의 투입으로 가능하다. 빛과 바람, 뿌리로부터 흡수된 물과 영양분, 그리고 농부의 시간과 노력.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들이 귤이라는 실체를 이룬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서서히 모여 보이고 만져지고 심지어 새콤한 맛을 내는 귤이 된다. 무엇이 된다는 건 이토록 놀라운 일이다.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이다.


“뀨울, 뀨울~” 아이의 말이 신비롭고 경이로웠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키가 50센티미터 남짓이던 아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였다. 먹고 자고 우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랬던 아기가 서서히 자라 돌을 지나고는 혼자 걷기 시작했다. 점차 스스로 걷고 움직이며 여기저기를 탐색하며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울음과 칭얼거림, 몇 개의 의성어만 토해내던 아기의 입에서 '말'이라는 게 굴러 나왔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터득한 시작점, 언어를 다루는 존재가 된다는 신호였다.


최근 읽은 책에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선박의 이름은 그대로임에도 바다를 항해하며 배를 점차 새로이 만들어 가는 아르고호의 선원”(롤랑 바르트)과도 같다고. 이 문장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나의 이름에는 변함이 없더라도 나의 형상이나 특질은 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사랑 이후에는 이전의 모습(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전의 모습으로는 타인을 사랑하는 항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 혹은 사랑이라는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면, 그 항해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끝없이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처럼 끝없는 되어감이다.


자신을 새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사랑은 때때로 한 사람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재조립을 요구한다. 부서진 조각을 신중하게 이어 붙여도 이전처럼 매끈하게 연결되지 않을 수 있다. 항해를 하면서 나는 변형 중이기 때문이다. 이어 붙지 않는 자리에 끼워 넣을 조각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 조각을 창조해 가는 일을 책에서는 ‘되어 가기’라고 표현한다.


사랑을 시작한 뒤 존재는 자신을 새로 만든다. 귤나무가 땅에 뿌리내리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귤을 만들어내듯, 바람과 햇살, 토양 속 물과 양분을 흡수해 자신을 변형하고 귤을 낳듯이. 세상이 건네는 사랑에 조응하여 달콤한 과실을 내어주듯이. 나는 아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전의 나를 잃었다. 이전의 모습으로는 난생처음인 이 항해를 이어갈 수 없었기에 끝없이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했고 여전히 그러는 중이다. 그런데 나의 사랑에는 ‘귤’처럼 ‘진짜’라고 부를만한 ‘되기’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아 종종 미궁에 빠진다. 제대로 되어가고 있을까. 진짜가 될 수 있을까.


한번 말문이 터진 너는 급속도로 언어를 익혀 나갔다. 이제 4학년이 되는 너의 키는 이미 나의 목 가까이에 다다랐다. 내가 알던 귤과 지금 내 앞의 귤이 다르듯, 너는 "뀨울!"하던 그 아기와도 다르다. 너는 열심히 네가 되어 간다. 너의 되어감은 경이로우면서도 자연스럽다.


귤을 먹는다. 시간을 품고 되어 가는 것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