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발레 하는 쿠크다씨

한라산 등반기 (1)

by 쿠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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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 서울 살고 있는 등산 애호가 친구에게 한 달 뒤에 한라산 등반 예약을 했는데 같이 갈 생각이 있냐며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탐방객이 제한되어 예약 시스템을 거쳐야 등반을 할 수 있다며 같이 가려면 빨리 예약해야 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아이도 봐야 하고 바쁜데 어떻게 한라산을 가지...'였다. 한라산 등반이 버킷 리스트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은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남편은 아이와 둘이 놀러 다니면 된다며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속전속결로 친구가 예약한 성판악 코스를 같이 예약했다.


찾아보니 초보자는 소요시간이 왕복 아홉 시간 정도였다. 너무 무턱대고 결정했나 걱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취미가 등산인 친구인데 괜히 따라갔다가 산행에 되려 방해될까 걱정도 되었다. 친구의 산행 속도에 맞추려면 워밍업을 해서 체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그날부터 발레를 하는 날에는 학원까지 걸어서 다니고, 발레를 쉬는 날은 아이 유치원에 보내고 근처 오름을 올랐다. 처음 오름을 오른 날, 너무 숨이 차서 헉헉댔고 걸어서 30분도 안 걸리는 꼭대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모한 선택을 후회했다. 오름 꼭대기에서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이 다가가기엔 엄두도 낼 수 없이 웅장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혼자 산행 연습을 한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사놓은 새 등산화와 가방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친구의 마음에 힘입어 틈 날 때마다 오름에 올랐다. 다니면 다닐수록 첫날보다 수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발레 학원은 빨리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린다. 두 시간 남짓 발레를 하고 다시 걸어오는 날이면 집 앞에서 다리가 풀려 계단에 주저앉았던 날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발레 학원에 땀범벅인 상태로 후덜 거리며 들어가서 그런지 학원 사람들이 다들 의아해했다. 한라산 간다고 하니 나의 저질체력을 아는 사람들이 역시나 맨날 다치면서 괜찮겠냐 걱정을 한 무더기로 했다. 한라산 가봤던 분은 오래 걷는 게 힘들었는데, 발레를 해서 그런지 다녀와서 후유증이 하나도 없었다며 발레 처음 배웠을 때가 훨씬 힘들었다고 걱정 말라 응원해 주셨다. 혼자만의 훈련을 하면서 틈틈이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함께 한라산을 오를 준비를 하며 어릴 때 대입을 준비하던 고 3 때가 떠오르기도 하였고, 웃고 떠들며 산에 오를 그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산행날이 점점 다가오던 어느 날, 친구에게 일이 너무 바빠서 일정이 안될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았다. 쉼 없이 훈련했는데 청천벽력 같았다. 최대한 일을 다 마치고 꼭 오겠다는 친구에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제발 무리해서라도 일을 마치고 와서 함께 산에 올랐으면 했다. 다음으로 미루기엔 여태까지 해 온 이 훈련을 기약 없이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기다리던 중 업무가 많아 회사에서 휴가를 취소하라고 했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의 속상함이 가득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마지막까지 꽉 잡고 있던 동아줄을 탁 놓친 기분이었다. 혼자 산행을 갈지 말지 갈등의 기로에 놓였다.


혼자 가게 될 상황이라고 하니 모두가 나를 말렸다. 혼자 가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다녀와서 며칠을 앓을 것이다. 날짜 미루고 그냥 친구와 다녀와라. 아니면 남편이라도 데려가라. 자꾸 주변 사람들이 말리니까 왠지 혼자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이왕 이렇게 깔린 판, 혼자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한라산을 여러 번 가 본 또 다른 친구에게 혼자 가는 팁을 얻었다. 준비물 (물은 최대한 많이, 커피, 발열 전투식량, 초코바 같은 간식거리, 무릎 보호대, 등산 스틱)을 챙기고, 새벽에는 깜깜하니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걷다 보면 밝아진다고 하였다. 올라가는 길에 말을 걸어 주는 사람들도 많아 지루하지 않다고 하였다. 정상에서 백록담 인증샷을 찍으려는 줄은 대략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니, 기다리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하면 재미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설레고 용기도 생겼다. 하지만 가기로 결심하고도 전날 밤 가방을 싸기까지 '갈까 말까'하는 마음이 수십 번 오락가락했다. 남편은 이런 날 보고 그렇게 확신이 없으면 하늘이 말리는 거라며 계획을 취소하길 원했다. 말릴수록 마음은 단단해졌고 새벽 알람을 맞추고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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