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 소송이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지난 10월 30일, 인천지방법원에 다녀왔습니다.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가 발생한, 1999년 10월 30일로부터 26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법정에 들어가서 맨 뒤에 앉아 있는데 재판장이 제게 물었습니다.
"변호사세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정해진 시각까지 10분 정도 남았던 터라, 판사 세 사람과 저는 조용히 앉아 변호사들을 기다렸습니다.
재판은 10분 만에 끝났고, 재판장이 제게 또 물었습니다.
"뒤에 계신 분, 사건 관련해서 나오신 건가요?"
또 "아니요" 했습니다.
이후 복도에서 담당 변호사님에게 코트워치를 소개하고 명함을 받았습니다. 변호사님이 "(재판장이 물어봤을 때) 기자라고 하지 그랬냐"라고 했습니다. "그랬으면 도움이 되었을까요?"라고 되물었지만, 곧바로 후회가 되었습니다. "아니요, 기자입니다"라고 할 걸…
제가 후회한 이유는 이 재판을 언론이, 즉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중요해서였습니다.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는 1999년 인천의 한 상가 건물에서 발생했습니다. 희생자 57명의 평균 나이가 17세일 정도로, 10대 청소년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참사로 희생된 고 이지혜 학생의 어머니는 26년 동안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아이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민사소송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종업원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업주의 종업원
처음 불이 붙은 건 지하 노래연습장이었습니다. 지하 노래연습장의 업주는 같은 건물의 2층 호프집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콜라텍 등 여러 업소를 운영했습니다.
(참사 이후, 호프집을 허가 없이 불법 운영했다는 사실, 업주와 경찰·지자체 공무원들의 유착 비리 등이 드러났습니다)
1999년 10월 30일, 콜라텍 종업원인 미성년 아르바이트생 2명은 업주 지시를 받고 지하 노래연습장을 청소하러 갔습니다. 인화성 물질인 '시너'로 바닥 페인트를 지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은 시너와 석유 중 무엇에 불이 더 잘 붙을지 이야기하며 시너를 바닥에 부었고, 그 상태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려 라이터를 켰습니다.
미성년 아르바이트생들이 인화성 물질을 이용한 작업을 하고 있었음에도 업주나 건물 관리인은 주의를 주거나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불과 유독가스는 건물 전체로 번졌습니다.
건물 2층 호프집에는 업주가 고용한 또 다른 종업원인 '관리사장'이 있었습니다. 호프집의 안전관리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호프집 바깥쪽 출입문은 (화재 확산을 막는) 방염 성능이 있었지만, 손님으로서는 이를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유리창 안쪽이 장식되어 있어 유리창 위치를 확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구조를 잘 아는 호프집 관리사장이 손님들을 대피시켜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1심 판결은 관리사장의 '과실'을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연기가 호프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발견한 피해자 OOO 등이 대피하려 하였으나, 술값을 내고 가라며 유리로 된 안쪽 출입문을 닫는 등 대피를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방염 성능이 있는 바깥쪽 출입문을 닫고 유리를 깨는 등 안전한 대피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채 피고인 혼자서 대피했다."
관리사장은 징역 3년 6개월 형을 받았습니다.
업주에게 고용된 종업원 세 사람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실수로 불을 낸 '실화자', 한 사람은 인명 피해를 키운 '가해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고 이지혜 학생은 실화자나 가해자가 아님에도, 그날 호프집에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¹ 종업원으로 분류돼 피해자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이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보내드리는 기사에 담았습니다.
¹ "당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지혜는 아르바이트를 하자는 친구 제안을 받고 호프집으로 간 것까지는 확인되었는데, 당일 현장에 있던 대부분이 사망함에 따라 실제 채용 여부 및 근로 여부는 확인되지 못했다", 정원옥, '故 이지혜 학생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