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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현실사이

당신은 항상 옳다.

by 윤현섭

눈치가 빠르다는 표현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먼저 긍정적으로 해석해 보면 어떤 신호를 잘 포착하여 적절히 대응한다는 뜻이고, 이는 ‘센스 있네’와 비슷한 의미가 된다. 반면 부정적으로 쓸 때는 교활하다거나 기회주의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눈치가 느리다는 표현은 어떨까? 아무리 생각해도 눈치가 느리다는 표현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눈치가 적당하다는 표현은 잘 안 쓰는 것을 감안하면, 결론적으로 눈치와 관련되어서는 1/4(빠르다×센스)의 확률 쪽으로 서는 게 안전하다.

작년 이맘때로 기억한다. 집에서 뉴스를 보는데 철도 파업과 관련한 내용이 흘러나왔다. 평소 지하철이나 기차를 잘 이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주제였으나, 아내는 달랐다. 아내는 꽤 먼 거리를 이동하는 프로 통근러(?)이고, 주중에는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과 철도를 매일 이용해 왔다. “파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검정 뿔테 안경을 장착한 아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내 사각빤쓰는 왜 자꾸 입는 거야!’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지만, 얼른 지워버리고 내 머릿속은 초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좋지만, 당장 내일부터 네가 너무 힘들지 않을까?” 극단적 T성향의 인간이 F에게 한 답변치 고는 훌륭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공감하는 척을 먼저 했으니까) 이 정도면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속으로 뿌듯해하고 있는데, 아내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 조금 불편하더라도 파업을 지지해.” 내 바람과는 매우 다르게 1/4은 고사하고 1/2도 못 맞춘 상황이 되었다. 그 당시 아내의 의견을 듣고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꿀 수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극단적 T성향 인간의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던 어두운 반항심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 감수하는 불편의 유통기한은 사람마다 다르다. 상대적으로 선의가 많이 남아 있는 초반에는 불편을 참을 수 있는 힘도 넉넉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선의의 모래시계는 빠르게 닳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며칠 만에 선의가 바닥난 사람과 몇 달을 버틴 사람의 존엄성은 달리 평가받아야 하나? 우리는 누구나 신념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상황에 따라 한쪽을 선택한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선택은 말 그대로 ‘상황에 따라’이며, 언제든지 방향은 바뀔 수 있다.

평소 신념에 따라 생활하던 사람이 현실에 벽에 부딪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경우를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건 창피한 게 아니다. 누가 그 사람의 사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겠는가? 보통의 인간이 적정 수준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불편함도 감수하고 신념을 추구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피해야 한다. 그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어쩌면 스스로를 속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완벽한 사람은 어쩌다 책에서 보면 된다.)

약 1년이 지난 오늘 출근길 라디오에서 철도 태업(?)과 관련된 뉴스를 들었다. 똑같은 현상을 파업에서 태업으로 다르게 말하는 걸 보면 누군가 신념에서 현실로 넘어간 듯 싶다. (아니면 더 나은 신념을 찾았거나) 사무실에 도착해서 휴대폰을 열어보니 또 다른 변절자의 문자가 와있었다.


‘저녁 표 없어짐. 다음 주 월까지 기약 없음. 처음에는 선의로 가득했던 한 직장여성의 마음이 코레일의 반복된 태업과 파업으로 변했음.


파업보다 태업을 앞에 둔 것만 봐도 변절자의 심경 변화가 잘 느껴졌다. 아내의 고백을 읽으며, 예전의 나였다면 ‘거봐라 쉽지 않지?’라며 일단 고소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적정 수준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나는 그러면 안 된다. 이 세상 누구보다 정직한 아내가 그렇게 느낀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내는 항상 옳다. 그리고 신념이고 뭐고를 떠나서 일단 아내가 불편하면 나는 반대다.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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