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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댓국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by 윤현섭

우연히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상경한 주인공이 도시에서 채우지 못 한 허기를 고향으로 내려와 해소하는 내용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씹던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한 대답은 '배고파서'였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는 모순적인 표현이 주는 울림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꽤 많다. 특히 애들이 좋아하는 피자, 마라탕, 지하철 샌드위치 같은 음식은 먹을수록 헛헛하다. 빵배와 밥배가 따로 있다고 우기는 애들처럼 난 한식배와 기타 음식배가 따로 있다.

나를 포함한 K 아저씨들에게는 두 가지 큰 비밀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건 (호환, 마마가 아니라) 배고픔이라는 것과 (특히 아침엔) 입이 까끌까끌해서 국물을 먹고 싶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어려운 결재를 받을 때 '점심시간 이후에 시도하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갑에서 여유가 나오듯 포만감은 허술함을 불러온다. (나야 땡큐) 코로나 때는 다들 각자도생 하느라 오로지 나를 위한 메뉴 선택이 가능했다. 그러나 요즘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모여서 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문제는 젊은 친구들이 고르는 메뉴가 나의 취향과는 잘 안 맞는다는 것이다. 다들 좋아하는 걸 고르라 해놓고 "나는 백반!"을 외치는 꼰대가 되기 싫어서 그냥 따라가지만, 다 먹은 후에도 느끼는 헛헛함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난 퇴근 후에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집 근처에 있는 순댓국집이다.

처음 그 순댓국집을 찾은 날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본인보다 전문가의 손맛을 믿는 아내가 퇴근길에 들러서 반찬 4종을 사 오라 지시한 날이었다. 톡으로 보낸 지도에 따라 이동해서 차를 세운 나는 바로 반찬 가게로 들어가 미션을 완수하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로 돌아가려는 찰나 옆에서 어떤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그릇 자알 먹었다. 꺼억!" 불그스름하게 세상을 다 가진 얼굴로 나를 향해 씩 웃는(feat. 고춧가루) 그를 보자 갑자기 점심에 먹은 파스타가 떠올랐다. 가게 주인은 내가 요청한 적 없는 알 덴테(?)라고 우겼지만, 그건 그냥 설익은 밀가루 맛이었다. 거의 반이나 남겼던 탓에 배가 너무 고팠다. 홀린 듯 아저씨가 나온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의주 순댓국. 평소 돌아다니면서 많이 본 프랜차이즈 식당이라 살짝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저녁 시간인데도 많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혼자 들어가 먹을 용기를 끌어 모으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문이 열리고 어서 들어오라는 종업원의 인사가 흘러나왔다. 얼떨결에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혼자 오셨죠? (주방을 바라보며) 이모! 여기 순댓국 한 개" 내 얼굴에 순댓국 먹을 거라고 쓰여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는 대로 먹으라는 자신감이 맘에 들어 가만히 있었다. "소주는 뭘로?" 난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기세에 눌려서 아무거나 달라고 했다. 착석해서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니 특이점이 있었다. 다인석보다 일인석이 훨씬 많았고, 손님들 대부분이 퇴근한 직장인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다들 나처럼 점심을 부실하게 먹었나?' 싶을 정도로 그들은 순댓국에 몰두해 있었다. 그중 구석에 앉은 남자가 내 시선을 끌었다. 복장과 무릎패드를 보니 배달기사였다. 내 또래로 보이던 그는 연신 눈물을 훔치며 순댓국을 먹고 있었다. '이게 그 정도로 맛있다고? 아님 기러기 아빠인가? 아니지 그럼 오히려 웃고 있어야지.' 혼자 한창 상상의 나래를 펴는 중에 주문한 순댓국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댓국은 평소 먹던 맛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부실한 점심 이후 먹는 첫끼인 데다가 집에서 도사리고 있는 한입충들이 없는 상황과 맞물려 너무 맛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다른 손님들처럼 순댓국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특히나 얼떨결에 시킨 소주는 화룡점정이라는 말을 절로 떠오르게 했다. 만족스럽게 먹고 계산할 때 사장님께 물어보니 저녁에는 주로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아 자리배치를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알려줬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걷어갔다. "집 앞에 이런 보물이 있었다니! 아 진짜 잘 먹었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는 여의주 순댓국집의 단골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으로 느끼한 걸 먹어서 오후 내내 순댓국만 떠올렸던 나는 퇴근하자마자 여의주 순댓국으로 차를 몰았다. 금요일이라 평소보다 차가 많이 막혔지만, 순댓국을 먹는다는 생각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근처에 주차를 한뒤 급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난 생각지도 못 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혼자 순댓국을 먹고 있는 아내였다. 집에서 애들과 같이 있어야 할 아내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의아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어야겠다 싶어서 들어가려는데, 소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난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대로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도어록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은은하게 소주 냄새를 풍기며 차가 막혀 늦었다고 거짓말하는 아내를 보자 나는 너무 걱정스러웠다. "저녁 먹어야지?"라는 나의 낚시성 질문에도 아내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다며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무엇이 아내를 침울하게 만든건지 궁금했고, 아내 홀로 순댓국집에서 고민하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침대에 누워 자기 직전까지 아는 척을 할까 말까 계속 고민하던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아까 순댓국집에서 혼자 있는 거 봤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같이 해결하자. 우린 영원히(?) 한 팀이잖아"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를 자연스럽게 소화했다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난 아내가 들려준 얘기는 내 예상을 한참 빗나간 내용이었다.

몇 개월 전 반찬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 곳에서 한 흑인(?)을 만나 도움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가 순댓국집을 추천해 주었다고 했다. 평소 순댓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내도 외국인이 추천하자 호기심이 생겨서 찾아갔고, 그날로 순댓국+소주 조합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했다. (feat. 심봉사) 그 후 금요일 퇴근길마다 여의주 순댓국집에 가는 즐거움을 생각하며 한 주를 버티는 중이다. (나한테 들킬까봐 15분만 머물다 온다는 말도 함께) 그러고 보니 금요일마다 생각이 없다며 저녁을 거르던 모습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급하게 먹느라 배가 너무 불렀던게지. 그리고 왜 울었냐는 질문에는 풋고추를 씹었는데 혓바닥이 너무 아려서 눈물이 찔끔 나왔고, 마침 개봉한 차가운 소주로 가글을 한 것뿐이라는 황당한 해명을 내놓았다. (역시 K 아줌마들은 절대 얕보면 안 된다.) 소중한(?) 비밀을 들켰다며 투덜대는 아내를 보면서, 역시 세상에 믿을 건 나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굳게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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