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주와 조규성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생각을 담아내는 대표적인 수단은 바로 말과 글이다. 말은 글에 비해 빠르고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무엇보다 사용하기가 쉽다. (얼마나 쉬우면 두 살 배기가 자유자재로 구사하겠는가?) 그러나 쉬운 만큼 가볍게 던지는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말의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추월할 때 화자는 본인도 이해 못 한 얘기를 지껄이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이런 예는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누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스토리를 본인의 생각인 양 읊어대는 사람을 보면 좀 가엽다. 본인은 멋진 말을 하거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다. 좋은 질문이 경청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듣는 사람은 당신보다 똑똑하다. 처음에는 당신의 말에 관심을 기울였다가도 감정 과잉, 빈약한 지식수준, 사고회로를 거치지 않은 말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순간 청자는 귀를 닫아버린다. 이쯤 되면 언어적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글을 사용하는 게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느끼게 된다. 글은 말보다 느리지만 머릿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거친 후에 나온다. 숙성을 거친 만큼 글은 말보다 깊이 있고 무엇보다 필자의 염원을 잘 담을 수 있다.
글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불러오는지 나는 지난 카타르 월드컵 기간에 똑똑히 목도했다. 평소 축구보다는 야구를 좋아하는 나도 국가대항전 이벤트(월드컵, 유로, 코파 등)는 꼭 챙겨서 보는 편이다. ‘노력은 배신할 수 있어도 포기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에 한참 꽂혀 있던 때라서 그런지 우루과이 전이 끝나자 16강 진출은 물 건너간 듯 보였다. 두 번째 경기인 가나전이 있는 날이었다. 집에서 같이 보기로 한 막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난 일찍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서 내려서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맞은편 새하얀 벽을 대놓고 가로지르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조규성! 조규성!’ 그 당시만 해도 조규성이 누군지 잘 몰랐던 나는 어떤 가정교육을 잘 못 받은 어린이가 저런 짓을 했을까? 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왠지 모를 서늘한 느낌이 목덜미를 쓱~ 훑고 지나갔다. (월드컵을 11월에 하니까 그런 거겠지?) 난 다시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 글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고 며칠 전 있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직장에서 한참 일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XX이 아버님! XX이가 피아노에 낙서를 했는데, 고민하다가 말씀드려야겠다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원장 선생님의 말씀은 대충 이랬다. 레슨을 하려고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까만 피아노 옆면에 흰 글씨가 쓰여있었다. ‘이호주 사실 나 너 좋아해’라는 문장이었고, 직전에 레슨 받은 아이가 XX이인 것을 감안하면 범인은 너희집 막내다. 호주에서 온 이호주(작명법 보소)라는 애가 있다는 사실부터 믿기지 않았지만, 난 연신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저녁에 둘째가 피아노 학원에서 찍어왔다는 사진을 보여주며 막내를 놀리는데, 원장 선생님이 말한 문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얀 벽에 쓰인 저 조규성의‘ㅈ’, 마치 갓 태어난 신생아가 발로 쓴 듯한 느낌의 ‘ㅈ’은 며칠 전 봤던 이호주의 ‘ㅈ’과 정확히 일치했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간 나는 (가정교육을 잘 받았으나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막내를 찾았다. “XX아! 엘리베이터 앞에 낙서 니가 한 거야?” 난 심각한 표정을 최대한 끌어내어 질문했는데, 막내의 대답은 태평했다. 방과 후 축구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오늘 경기의 승리를 염원하며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을 쓰기로 했는데, 자기는 조규성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구교실 단톡방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여주는데, 어떤 아이는 식탁 어떤 아이는 책상에 본인들의 염원이 가득 담긴 글을 써놓은 게 보였다. (저녁에 우리 단지에서 곡소리 좀 나겠는데?)
항상 옳은 아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막내를 찾았다. (역시 사람 생각은 비슷하다.) 나보다 훨씬 무서운 아내의 표정을 보고 막내는 아니라고 잡아뗐다. 그러나 요 앞에서 경비 아저씨를 만났다는 둥, 있지도 않은 CCTV를 돌려봤다는 둥 허술한 스토리를 앞세운 아내의 추궁 앞에 결국 막내는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왕 하려면 차라리 저렇게 하는 게 낫지 않아?’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적정 수준의 안락함을 추구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진 않았다. (나중에 이렇게 글로 쓰면 된다.)
모두 알다시피 가나전에서 조규성은 그림 같은 헤더를 두 개나 작열시켰고, 그날 밤 우리 아파트 단지는 새벽까지 떠들썩했다. (feat. 곡소리) 그 후 제대로 탄력 받은 대표팀은 포르투갈을 물리쳤고, 결국 16강에 진출하면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명언을 만들어냈다. 현실에 찌든 어른들은 언제든지 쉽게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한 축구교실 아이들의 염원을 담은 글은 이렇게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신도 글에 염원을 담아 기적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나요? (막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조규성을 세 번 쓰지 그랬어! 아 참! 그리고 호주는 어떻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