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짜증 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여의주 순댓국집을 가는 날이니까. 금요일마다 난 고독한 미식가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이 나이 먹도록 왜 그 맛을 몰랐을까? 그 외국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난 미명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자주 가던 반찬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날따라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 서로의 안부도 묻고 '누구의 남편이 더 이상한가'라는 주제로 치열한 배틀(feat. Drop the beat)도 열리던 곳이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 이유는 낯선 외국인 때문이었다. 등판으로 진열대를 다 가릴 만큼 덩치가 큰 흑인이 반찬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장바구니를 입에 문 도고 아르헨티노를 연상시켰다.
"자기야! 자기 영어 좀 하지? 쟤가 자꾸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데 자기가 설명 좀 해줘. 벽안인이 왜 비지를 궁금해하고 지랄이야."
외국인만 내보내 주면, 만 원짜리 반찬 4종을 구천 원에 넘기겠다는 주인아줌마의 은밀한 제안을 난 흔쾌히 받아들였다.
----- 영어 대화 start -----
"저기요. 찾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 드릴까요?"
"제가 비건(?)이라 못 먹는 음식이 많은데 뜨거운 국물이 생각나서요. 집에서 뭐라도 끓여 먹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 그래서 비지가 뭔지 궁금해하셨군요. 간단하게 얘기하면 비지는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랍니다."
"What the f... 찌꺼기라고요? 도대체 그런 걸 왜 먹는 거죠?"
"찌개로 만들어 먹으면 맛이 그만이랍니다. 만드는 방법은 김치로 요래조래 조래요래인데요. 좀 복잡할 수 있으니까 구글링 해보세요."
----- 영어 대화 end -----
비지를 구입한 외국인은 알려줘서 고맙다며 근처에 있는 순댓국집을 추천해 주었다. 순댓국은 별로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지만, 국제학교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다는 흑인(half Korean?)이 강력 추천한 곳이라 궁금했다. 난 할인받은 반찬 4종을 들고 바로 순댓국집으로 향했다. 가게 안에 들어가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댓국과 소주를 주문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바로 나왔다. 이렇게 혼자 느긋하게 음식을 먹는 게 얼마만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요리 못 하는 남편과 결혼한 죄로 퇴근 후에도 맘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전화로 국물이 먹고 싶다던 남편을 생각하니 짜증이 마구 말려왔다. (이럴 거면 차라리 국물하고 결혼하지 그랬어!) 아무튼 이런 분위기에선 순댓국이 아니라 깍두기만 씹어 먹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단골이 되어버린 여의주 순댓국집을 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주인장이 비장한 눈빛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주문하지 않은 순댓국과 소주가 바로 내 앞에 놓였다. "손님! 이거 오소리감투라는 건데 단골한테만 드리는 거예요." 주인장은 독립운동 모임에서나 들을 법한 톤으로 말했다. 양두구육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순댓국집에서 오소리 고기를 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난 주인장을 믿고 오소리감투를 입에 넣었다. 쫄깃한 식감과 구수한 육향이 입안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내가 단골이 될 수밖에 없지. 땡큐 빅터.(반찬집 흑인) 음식이 나오기 전에 씹은 풋고추만 아니었더라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급하게 소주로 가글하지 않았더라면 큰 일 날 뻔했어.' 난 15분 만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집으로 향했다.
들어오기 전에 향수를 뿌렸지만, 유난히 후각이 예민한 남편은 눈치챌 수도 있다. 지난주에도 웬 술냄새가 난다며 추궁하는 통에 난감한 적이 있었으니까. 나는 남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안방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오자 급하게 마신 술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나만 아는 비밀로 영원히 간직할 거야.'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서 나를 깨우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빡 잠들어서 좋은 꿈을 꾸는 중이었는데, 암튼 센스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남편의 말에 난 화들짝 잠이 깨고 말았다.
"사실 아까 순댓국집에서 혼자 있는 거 봤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같이 해결하자."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내가 혼자 순댓국을 먹는 걸 몰래 지켜봤다는 말인가? 아! 소오름. 난 비슷한 사람을 본 거 같다고 우기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남편은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수록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 혼자 맘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없다. 비밀은 비밀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인데 너무 안타깝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끔찍이 걱정해 주는 남편이 있는데 그게 뭐가 대수랴. 생각하면 할수록 남편은 내 인생의 로또 같은 존재다. (진짜 더럽게 안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