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sum qualis eram
누군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라이선스를 확인하는 것이다. 가령 2종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스틱을 몰 수 없고, 그마저도 없는 사람은 아예 운전 자체를 못한다. 또 다른 예로 개인 병원이나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면 액자에 넣어진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건 단순한 데코용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니까 안심하고 맡기라는 무언의 설득이다. 이렇듯 라이선스는 말이나 행동으로 장황하게 설명해야 할 자신의 능력을 단숨에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요즘은 워낙 다양한 라이선스가 생겨서 과연 그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어쨌든 라이선스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수반된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 태권도 도장 옆에 바둑 학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그날로 나와 동생을 그곳에 등록시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하루 종일 뛰어놀기만 하는 형제가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정신을 수양하라는 의미로 보낸 것 같은데, 그건 경기도 오산이었다. 당시 아마추어 바둑의 급수는 18급부터였고, 한 급수를 올리기 위해서는 목표 대국 횟수를 달성해야 했다. 아이들은 한판이 끝날 때마다 서로의 이름과 대국 결과(ex 흑 5집반 승)를 일지에 작성했고, 그 실적이 쌓이면 사범님이 급수를 인정해 주는 식이었다. 난 조금 혼란스러웠다. 바로 옆 태권도만 봐도 1단이 되기 위해서는 국기원에서 전문위원에게 품새와 겨루기를 평가받아야 하는데, 바둑은 너무 간단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얀 난닝구를 입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채 쪼그려 앉아 라면을 끓여 먹는 사범님이 우리를 평가한다니, 그건 너무 꿀 아닌가? 승급 체계에 대한 파악을 끝낸 나와 동생은 그날 이후 틈만 나면 대국을 벌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건 진지한 수양과는 거리가 멀었고, 거의 (최양락의) 알까기 수준의 대국이었다. 며칠 후에 형제 어드밴티지를 적극 활용한 결과를 사범님께 들이밀자, 사범님은 조용히 서랍을 열고 새 일지를 꺼내어 나에게 건넸다. "처음부터 다시!" 요즘 같았으면 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바둑 학원을 끊어달라고 징징거렸을 테지만, 당시 우리가 가진 휴대전화는 종이컵 두 개를 실로 이은 것뿐이었다.
비단 라이선스나 급수가 아니더라도 특정 분야에서 오랫동안 몰입한 사람에게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아우라가 생긴다. 특히 본인이 스스로 실력을 갖춘 후에 다른 사람과 대화해 보면, 소위 말하는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요즘 친절한 유튜브에선 단 한 번만 검색해도 관련 대가들의 인터뷰가 수도 없이 쏟아지기 때문에 그분들의 얘기가 특별한 비법처럼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대가들의 말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① 그날의 목표 훈련량을 채우면, 컨디션이 좋아도 더 무리하진 않습니다. (Roger Federer)
② 매일 200자 원고지 20장 분량의 글을 씁니다. 작업 속도는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도록 신경 쓰는 편입니다. (村上春樹)
③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체육관으로 갑니다. 딱히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루틴이죠. (Cristiano Ronaldo)
누가 봐도 GOAT라고 인정할만한 사람들의 한마디는 바위처럼 무겁다. 그들이 평생을 바쳐 얻은 깨달음을 들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어느 맛집의 톡 쏘는 양념처럼 자극적인 느낌은 없다. 그저 헌신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서 '매일' 노력한다는 게 그들의 비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간단한 방법을 누가 모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난 반문하고 싶다. 과연 당신은 매일 부단히 노력하는 게 단 하나라도 있냐고. 지난 8월 말 난 지인들끼리 모인 식사자리에서 헬스장에 등록했고 매일 새벽운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누군가 곧 그만두게 될 것이고, 혹시 근육이 생겨도 결국은 빠지면서 가죽이 늘어진다는 덕담(?)을 건넸다. 그건 마치 어차피 내려올 텐데 왜 산에 올라가냐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그나마 근육질의 몸을 가졌으면 약간의 설득력이라도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 친구의 배는 벨트 밖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우리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이 그렇다. 그게 무엇이든 어제보다 나아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은 훌륭하다. 비록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과정을 즐기고 성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꼭 백록담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중간에 예쁜 꽃 한 송이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새벽 5시 40분 어김없이 울리는 알람소리를 들으며, 난 순식간에 헬스장에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열개쯤 떠올렸다. 월요일, 추위, 어제한 빡쎈 하체운동 등등. 하지만 곧이어 엉뚱하게도 호날두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얘기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냥 하세요.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