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편지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예레미야서 32장 27절의 구절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육체를 이해하시는 하나님이라 한다.
육체는 한계와 부족과 결핍과 모자람을 상징한다.
육아와 공부. 살림을 병행한다는 건 부족함. 한계와의 만남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전에는 나의 한계가 슬픔이고 괴로움이며 분노. 서글픔이었다면 요즘은 두뇌활동을 포함한 모든 육체의 한계가 또다른 시작점. 동기부여가 되곤한다는 것이다.
이건 살림을 하면서 경험하는 것인데. 냉장고가 텅 비어야 장을 보고싶다는 동기가 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럴 땐 빵 하나를 골라도 즐겁다. 이전엔 식빵을 골랐으니 이번엔 모닝빵을 주문할까 아니면 크로와상 생지를 주문해서 에프에 구워볼까.
문제집을 회독수를 늘려가며 눈에 들어오는 선지들과 손이 저절로 움직여지는 계산문제들을 만날때 이전의 문제 앞에서 깜깜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 그래서 1회독이라도 더 늘리려는 것 그게 나의 유일한 동기이자 공부의 시작점이다.
그동안 잘 따라오던 아이가 오늘 아침 학교 가기 전 굉장한 짜증을 부렸다. 날씨가 꾸덕해서인지 몰라도 덩달아 굉장한 짜증이 났다. 육체의 한계다. 여유의 모자람이다. 여기서 다시 육아의 시작점이다. 어떤점이 아이에게 짜증이었을까.
만약 늘 아이들이 웃음만을 주고 늘 공부가 슬슬 풀리고 합격이 너무 쉽고 늘 여윳돈이 넘쳐서 매일매일 장을 본다면 삶이 즐거울까. 부모님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고 걱정 없다면 완벽할까. 그런건 지구상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서의 하나님은 육체의 하나님이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한다.
부족함과 육체의 한계로 시작하는 육아와 공부 살림 그리고 가족에 대한 걱정과 염려.
한계가 없다면 시작도 없다.
능치 못하신 하나님이 한계의 육체로서 함께 있다는 건 기대감을 주고 희망을 준다. 그 기대감이 새로운 단계를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