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곡집 - ㅅㄱㅈ
놀이공원의 회전목마가 돌고 있다. 마치 멈추지 않을 것처럼 계속해서 돌고 있다. 이 나무로 만든 말은 누군가를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기능을 위한 기능적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의 힘으로도 갈 수 없고 그저 정해진 한 방향을 일정한 속도를 가지고 회전한다.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회전목마'라는 이름은 정말이지 탁월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붙어 있는 모든 도구들은 그 기능을 표현하기 위해 이름이 붙어 있다.
차갑게 내용물을 보존하는 냉장고, 바람을 막아주는 바람막이, 비를 막아주는 우산 모두 사람이 지어낸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에게 붙어있는 이름은 뭘까?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지어낸 명칭일 테다. 이것은 사람의 고유한 이름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때론 기능적인 이름이 붙곤 한다. 나무꾼, 군인, 화가 모두 그 사람의 고고한 인격과 특성은 거세당한 채, 그저 나무를 베는 사람, 군대에 있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 해석된다.
물론 그러한 명칭 속에 사람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이미지가 각자의 마음속에 투영되긴 하지만 때론 미디어를 통한 각종 매체에서 부여하는 선입견은 사회를 더욱 삭막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요즘 학생들은 예의범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예전엔 선생들이 패서라도 가르쳤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 이건 어쩌면 선생과 학생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사고하는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교사과 아이들이 있을까? 그들은 각자의 세계가 있고 커뮤니티 속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군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예의 없게 행동하게 두어야 한다가 이 글의 결론이다. 전체를 부분으로 호도하기보다는 부분적인 개체를 가지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한다. 전체가 부분을 설명할 수 없고, 부분이 다시 전체가 될 수 없다. 어느 집단이나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아웃라이어가 존재한다. 지금 회전목마가 멈췄다. 그리고 어떤 목마는 갑자기 반대로 돌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목마를 관찰하며 사진을 찍는다. 모든 목마와 반대로 돌아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