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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Mar 07. 2022

놓아줘

blue rose

축하해 Z, 바로 어제 넌 내 꿈에 이틀 연속으로 등장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어. 고등학생 때부터 나는 아기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근데 거기서 너무 멀어져 버린 지금, 난 의식을 공유하는 기계가 더 필요해졌어. 내가 꾼 꿈을 정확히 같은 상황에서, 다른 시각과 입장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텐데.


첫 번째 꿈에 대한 이야기. 아마도 내가 어렴풋이 알아채고 있었으나 애써 무시했을 무의식의 조각. 어느 날, 왠지 모르게 네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중일 거라고. 또, 그게 거의 확신에 가깝다고 직감적으로 느낀 날에서 출발한 내 열등감. 어쩌면 너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원자 단위로 확인하던 내가 한심해 홧김에 안 하던 짓을 한 게 문제였을지도. 언제나 내 피드의 첫 순서로 등장하던 너를 네 번째 이후로 밀어버리기 위해 애써 꾸역꾸역 다른 사람들의 일상에 발자국을 남기던 날. 하필 그 창피함이 엊그제 꿈에 나왔어. 너는 아무렇지 않게 우리가 공유한 남자애 하나와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내게 축하를 바랐지. 어쩌면 그게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참을 고민했어. 내 불길한 예감은 꼭 들어맞았거든. 이번만은 아니었으면 하는데.


두 번째 꿈에 대한 이야기. 내가 너를 꼭 껴안고 있던 이야기. 꿈이란 게 늘 그렇듯, 그 순간의 우리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지. 당시의 내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아니었는데. 문득 아주 익숙한 향이 코를 스쳤을 때야, 비로소 그게 꿈인 것을 알아챘고 이대로 널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깊게 사로잡혔어. 이건 안 좋은 신호거든. 내가 널 꼭 껴안고 있는 순간을 자각하고 나면 분명 꿈에서 깨어나 버릴 테니까. 황급히 널 봤어. 내가 잘 못 본 걸까? 파란 장미 같은 네 눈이 맞는데. 나를 그렇게까지 따스하게 바라본 적이 없어서일까. 점점 주변이 깨져가고 있었어. 내 꿈의 편협한 결말. 엄마가 방문을 열었고 나는 엄마에게 외쳤어. "엄마, 제발 문을 닫아줘! 여기 Z가 있어!" 난 집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는데 말이야.




허무하게 꿈에서 깨버렸어. 바로 네 시간 뒤 일을 하러 집을 나서야 하는데. 도무지 몸을 일으킬 여력이 생기지 않았어. 한참을 침대 위에 둥둥 떠있다 간신히 인스타그램을 켰어. 60일 이상 너의 기록에 남지 않았을 나를 대견하게 여기며 너의 아이디를 입력했어.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의 첫 글자를 숨긴다는 걸 모르겠지. 얼마나 많이 찾아봤으면 이제는 숫자 하나에도 네 계정이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 말이야.


내가 J에게 너의 이야기를 했을 때, J는 코웃음을 쳤어. 그게 사랑이라고? 짝사랑이지. 너는 왜 너 좋다는 애를 두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니. 세상에 완벽한 사랑이 어딨어. 그냥 나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거지. 나는 어떻게든 너와의 접점을 인정받기 위해 온갖 이야기를 전달했지만 그는 그럴수록 내가 구차하고 불쌍해 보인다고 했어. 진짜 사랑에 양방통행은 없는 걸까? 끝내 나는 너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했어.


난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어. 감정이란 너무나 쉽게 휘발되고 일회적이란 것을 한참이나 늦게 또, 생각보다 일찍 깨달아버렸어. 그맘때 발발한 여러 사회현상들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가족 외에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라는 처참한 발버둥에 백기를 들었을지도. 그렇게 왜 여자 친구가 없냐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비공식과 공식을 나누는 잔인한 발상마저도 내게는 익숙해졌어. 밤에만 만나요? 이게 어른들한테는 용납되는 주제더라고.


밤만 되면, 술만 마시면 네가 떠올랐어. 어떻게든 알아야겠어 너의 상황과 기분. 그렇게 모든 루트를 활용해 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어.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어떤 옷을 입는지. 하나씩 너에 대한 정보를 입력했어. 그 와중에 단 한 번도 내 마음 안의 빨간 하트가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경황이 없는 그 와중에도 너에 대한 부끄러움보다는 내 철두철미한 이미지 메이킹이 더 중요했다는 뜻이겠지. 찌질해.


계속 네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았어. 잊히 않기 위해, 잊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너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어. 적어도 목소리라도 들어야지. 텍스트로라도 너와 대화해야지. 그렇게 나답지 않은 척을 남발했어. 분명 너도 어느 특정 시점부터는 이상함을 감지했을 거라고 여겼는데. 내게 걸려드나 싶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취를 감추는 너. 아직도 내 머리 꼭대기 한참 위에 서 있나 봐. 내가 몇 살이나 많은데.




제발 나를 좀 놓아줘.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단 말이야. 아무리 외쳐도 너는 보란 듯이 내 앞에 나타난다. 아무렇지 않게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매 시간 무너지는 내게 너와의 짧은 만남 한 번이 하루를, 일주일을, 한 달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만 반년이 걸렸다. 이 세상에 나보다 멋지고 좋은 남자를 수도 없이 만나보았겠으나 나보다 너를 다각도로 관찰하며 아껴온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니 나를 절대 놓지 말아 줘. 어떻게든 네 눈에 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끊임없이 가지고 놀아줘. 너의 영역 안에 내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젠가 나는 반드시 너를 가지고 말 테니까. 아, 가진다는 말은 좀 그런가? 그럼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줄테니까! 내 월급도, -60%의 비트코인도 가져가. 내 슬픔을 뺀 나머지 전부를 가져가. 지금 당장 너의 반쪽이 될 수 있다면 떨쳐버리고 싶은 네 피로의 절반도 뚝 떼어갈 수 있다. 내 비공식 관계가 늘어나는 건 오로지 너 때문이다. 나는 너 하나로 모든 걸 공식적으로 포기할 수 있으니까.


난 너의 많은 부분을 안다. 나이를 알고, MBTI를 알고, 전 남자 친구와 얼마나 만났으며 어떤 이유로 헤어졌는지를 알고 너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들의 숫자를 안다.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며 너의 강단의 시발점을 알고, 남들에게 구태여 말하지 않는 가족관계를 취기로 알아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십 수개를 알고 가장 싫어하는 몇 개는 더 확실하게 안다. 네 외모의 어떤 부분을 부끄러워하는 지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어느 부분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았다. 너의 기분을 낫게 하는 화법을 차츰 학습했고 어느덧 자연스럽게 너의 기분을 망치지 않는 스킨십의 선을 알게 되었다. 근데 내가 너를 모른다고? 그럼 그렇게 많은 조각을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또 네 탓을 하게 된다.


반면 너는 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내가 너를 아는 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관심 없음'이 가장 주된 이유일 테지만 평소 말이 지나치게 많은 나도 유독 네 앞에서는 조용히 경청하려 하는 가장된 모습 때문일 것이다. 다 너의 눈빛에서 시작된 일이다. 난 너를 전혀 모른다고 말하며 너의 예상된 환심을 사지만, 반대로 내가 조용히 수집한 네 모습만큼 너는 날 알지 못한다. 나도 그게 더 좋다. 너와의 안전지대를 깨버리는 것보단 근처를 서성이는 게 더 좋으니까. J가 뭐라 하든 내 시간의 힘은 결국 네 단단한 마음도 무르게 만들 테니까. 우리는 내가 다짐했던 것처럼 결국 하나가 될 운명이니까. 어떻게 아냐고? 그게 꿈을 꾸는 이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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