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Mar 27. 2022

해나에게

VIVIENNE

우리에겐 아무런 연이 없어야 했다. 인연의 인과 연은 문자 그대로 사람 사이의 연이 아니듯 그냥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발생했던 마주침으로 지나가야 했다. 내가 여태 스쳐 보냈던 수천 명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온몸에 불을 붙인 듯한 열기는 가라앉은 지 오래다. 이제는 해나를 봐도 마음속 동요가 그리 크지 않다. 내가 그토록 너를 갈망했다는 게 신기루 같다. 이번에도 시간의 힘은 위대했고 너를 향한 내 마음도 그리 숭고하진 않았나 보다. 고작 이 정도의 수명을 가진 사랑에 내 8개월을 허비하다니.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내 이십 대의 끝자락이 해나였으면 했다. 그렇게 내가 먼저 삼십 대가 되고 차곡차곡 모은 돈을 바탕으로 서른넷 정도에는 식을 올리면 딱이겠다 싶었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도 스코어 보드의 자릿 수가 바뀌면 달라졌으니까. 그놈이 그놈이고, 그년이 그년이니까. 그런데 그년 중에도 해나는 달라 보였다. 아니, 달랐다.




텍스트보단 인스타그램에서, 인스타그램보단 현실에서 해나는 더 매력적이었다.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는 나와는 정반대로 원래부터 그렇게 생겨 먹은 듯 첫 만남부터 무례한 언행. 내 대형화재 같은 평소 성격도 부질없는 너털웃음으로 치환하게 하는 그 어이없고 이유 있는 자신감. 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남의 횟수가 늘어가고 대화의 폭이 넓어질수록 나는 머릿속으로 조용히 계산만 했다. 과연 헷갈리는 이 감정에는 어떤 변수가 끼어들어있나. 해나는 내가 좋아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왜 주기적으로 보고 싶은 감정이 샘솟는 것일까.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나누다 계산서를 챙기며 몰래 훔쳐본 해나의 눈동자가 이유를 말했다. 애초부터 변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나라는 상수가 덩그러니 거기 있었다.


언젠가 해나와 커피를 마시다가 들은 나와는 전혀 접점이 없는 그녀의 이상형 때문에 괜한 조바심이 났다. 나도 나름 인기 많은데. 너 진짜 나를 남자로는 전혀 안 보는구나.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났다. 그게 너의 방어 태세인 줄 알았다. 여기까지가 우리 사이의 선이야. 넘어오지 마. 하는 경고 표시인 줄 알았다.


반대로 내가 너 하나 때문에 얼마나 아까운 기회들을 놓쳤는지 모를 것이다. 나는 항상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네가 떠올라 잔인하게도 그들 앞에서 너를 묘사하며 분에 넘치는 사랑을 걷어차버렸으니까. 너에게 기꺼이 이용당할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채워 넣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명백한 의도를 가진 플러팅을 건넸을 때, 해나는 평소대로 크게 화를 냈어야만 했다. 무언가를 떼어주는 이 뻔한 매너에 단호한 거절 의사를 내비쳐야 했다. 내가 아는 너는 분명 그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만히 그 행동을 허락한 그날의 너 때문에 또 한 번 어딘가에 구동 오류가 생겼다.


그날 밤, 나는 또 실체 없이 편집된 여러 장면의 꿈 때문에 잠을 설쳤다. 그날 이후는 기억이 흐릿하다. 내 성향이 그렇듯 휴대전화 어딘가에 그 내용들을 기록해뒀을 텐데. 유실되었나?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어딘가 기쁘면서도 뒷맛이 석연치 않다. 이유 모를 거리감이 또 하나 생긴 것만 같았다.


하나만 확실하게 해 주지. 또 나만의 착각인 건가. 나도 뭐 일상생활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기분 탓인지 뚝 끊어진 네 소식에 나도 무슨 말을 먼저 건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친구들의 의견은 9:1. 해나는 나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너만 갖고 있다. 네들이 뭔데 우리 사이를 판단해.


그럼 우리 사이는 뭔데? 지인, 친구, 썸, 연인. 세상이 정의한 단어에 우리는 없다. 나는 해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을 여러 사람들에게 느꼈으며 이십 대 초반과 달리 좋은 친구를 쉽게 놓치지 않으려는 비겁함 또한 가졌다. 썸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확실한 기회로 곧장 연결하는 눈치와 대범함은 물론이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겹치는 지인들에 대한 물밑 작업까지 완료해둔 상태다. 그러나 이 철두철미함도 해나에게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힘든 게 아니라 이런 게 힘들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안다. 해나와 나는 결국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정의하는 단어는 없지만 그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나는 언젠가 닿을지도 모를 이 애정을 묵묵히 발송하고 또, 주문할 것이다. 언젠가 해나가 우리 집 초인종을 딩동- 누를 수도 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놓아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