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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19. 2022

커피만 마시고 각자 집으로 가는 연애가 어때서요

설렘이 무뎌지면 끝이라 쉽게 생각해

'좋게 좋게 가자'는 말을 자주 하시나요? 저는 정말 싫어하는 말입니다. 일단 낙담하고 시작하는 느낌이라 제 주 성향과는 맞지 않거든요. 한편으로는 발화자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길래 저렇게까지 말할까 안쓰럽기도 합니다. 포기에는 숨겨진 내러티브가 있을 테니까요. 저는 그 이야기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일방향적인 진심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애가 탈수록 그런 것 같아요. 얼른 그 마음을 확인해 넥스트 스텝을 준비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 냉소를 지나 억텐이 패션이 된 시대답게 감정 표현도 축이 기울어졌을 때야 정담(情談)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왕왕 듭니다. 왜 디톡스는 음식과 건강에만 있을까요?


섹스를 예로 들어볼까요. 인간을 동물과 같은 카테고리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더 고차원적 생물로 방증하는데 이보다 더 적확한 모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고 고도화된 개인/사회적 행위. 이 줄다리기에는 고온의 열기만 있습니다. 냉기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래야만 제대로(?) 마무리했다는 느낌도 있고요.


아마도 어렸을 때는 호르몬이, 그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는 술이 주요 진앙지일 것입니다. 둘 다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는 상황을 만드는 촉매제죠. 가볍다는 표현이 어딘가 잘못된 거 같다만 우리는 이 느낌이 뭔지 잘 알잖아요? 안정 단계에 다다르기 전까지 섹스는 대개 즉흥적으로 시작됩니다. 재밌어요.


그래요. 결국 이 재미가 화학반응을 만듭니다. 호감이란 사실 섹스보다 선행하는 감정이 아닐지도 몰라요. 오히려 이 둘은 나란히, 때로는 엎치락뒤치락 선후를 바꿔가며 뒤섞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무엇부터 상상하시나요? 저는 같이 자는 순간을 상상합니다. 어떤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십 대 초반에는 섹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야 말로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어야 썸의 마지노선이 충족되는 게 아닐까 오판한 적도 있지요. 플라토닉, 아 그거 허울만 좋지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다만 문제는 이후였습니다. 여차저차 섹스가 끝나고 나면 저는 과장 조금 보태서 그냥 죽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남자들이 말하는 현자 타임, 뭐 그런 것도 일부 있는데 그냥 10분 정도 뒤에 세상이 이대로 무너졌으면 좋겠다. 그전까지 하염없이 담배나 태우면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싶다. 하는 그런 감정이 잦았습니다.


너무 강하게 스파크가 튀었기 때문이겠죠. 불과 이십 분 남짓한 그 관계 전까지만 해도 몇 배의 시간을 공들여 여기까지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는데. 분출 이후에는 되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라니. 가끔은 옆에 있는 사람이 죽도록 미워져 꺼져줬으면 했어요. 물론 그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들도 느꼈을 겁니다.


그렇게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가끔 나는 사랑해서 섹스하는 게 아니라 섹스를 하니까 사랑한다고 믿어야 되는 사람이 되었어요. 2주 전의 섹슈얼 텐션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전희를 건너뛰었습니다. 성욕 해소에만 몰두하고 아주 과감하게 강압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그게 정복감이라는 쓸모없는 트로피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멀쩡한 척, 순진한 척하며 사회적 동물 행세를 하는 게 미덕인 세상이니까요. 섹스란 무릇 숨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근차근 서로를 배워야 하는 완전한 학습의 영역을 저는 처음부터 교육자의 입장으로 임했습니다. AV의 악영향은 오로지 이것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보다 더한 상대를 만나고 나서야 내가 여전히 학생임을 자각했습니다. 성관계가 하나도 재미없고 행복하지 않다는 걸 겪고 나서야 연애에는 술보다는 커피가, 섹스보다는 대화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란 말은 변명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진정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인정만 하면 되는 문제였습니다. 인간은 섹스의 동물이다. 인정만 하고 그걸 전부처럼 여기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어요. 그래, 너나 나나 피차 똑같은 인간인데 그래도 우리 더 좋은 관계를 위해서 성관계를 잠시 뒤의 단계로 미뤄보자.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란 걸 수 번의 연애 끝에야 알게 되었다니.


조금씩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어떻게든 벗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오늘 어떤 마음으로 이런 옷을 입었는지. 입맞춤의 찝찝함 때문에 싫어했던 립스틱이 어떤 발색을 가지고 있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온전히 나 때문에 택했던 수많은 선택이 보였습니다.


그제야 계약서가 아닌 질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당신에 대해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았다니. 우리의 관심사가 이렇게나 비슷하고 또 다르다니. 매일매일이 새로웠고 뜨악했습니다. 사랑의 생물학적 유통기한이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면 떠벌리듯 권태에 당위를 부여하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당신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총합 6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커피를 마시며 들은 1시간의 이야기가 연 단위의 시간보다 훨씬 많은 서사를 담았네요. 이번에야 말로 진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어떤 정보는 기록을 했고 어떤 말은 오롯이 마음속에 아로새겼습니다. 내가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군요.


오늘은 섹스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을 거고요. 그 따위 것이야 뭐 내일이나 모레에도 할 수 있는 고리타분한 거잖아요? 언젠가 사랑은 술에서 싹트는 거라고 함께 낄낄댔던 지인들이 생각나네요. 나는 이제 말할 수 있습니다. "커피만 마시고 각자 집으로 가는 연애가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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