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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n 13. 2022

<나의 해방일지> 코멘터리

1을 향한 사랑

직장동료 W양이 처음 <나의 해방일지>를 추천했을 때는 시대극 같은 제목 때문에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W가 묘사한 몇 가지 단편적인 장면과 구씨가 보낸 세 줄의 결정적인 문자. 딱 그것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유튜브 클립 정도만 찾아보다 오래간만에 3일을 연달아 쉬게 되어 양양에서 전편을 봤다.



<나의 해방일지>가 좋은 점은 우선 어두운 사람들 때문이다. 극의 초반부가 너무나 우울해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인원이 많다고 한다. 반면 나는 어두운 캐릭터들과 대비되는 산포의 밝은 로케이션이 묘하게 끌려 오히려 초반부가 더욱 흥미로웠다. 회차가 지날수록 사람들은 행복에 가까워지나 산포는 칙칙해져만 가는 이 대비는 그래서 더욱 극명해 보인다. 명백한 연출적 의도다.



<멜로가 체질>에서 "Here's looking at you, kids"라는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뻔뻔하게, 그러나 담백하게 건네던 손석구가 이 드라마를 통해 크게 붐업되었다. 나도 물론 구씨 신드롬에 지금까지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그러나 <나의 해방일지>는 오히려 이민기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극 중에서 가장 많은 대사를 쏟아내며 유일하게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이 된다. 그가 분한 염창희는 우리와 가장 비슷한 소시민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되려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 사는 동네 먼저 검색해 보는 게 인간인데.” - 오두환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랬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내가 산포 시 산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산포 시가 어디 붙었는 지를 몰라. 내가 1호선을 타는지, 4호선을 타는지. 어차피 자기는 경기도 안 살 건데 뭐 하러 관심 갖냐고 해. 하고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 태어나갖고...” - 염창희


“귀뚜라미가 울 땐 24 도래. 안 단다 지들도.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그래서 저렇게 간절히 구애 중이라는 거란다. 겨울을 혼자 나지 않으려고. - 염기정


“얼른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

“겨울엔 또 그럴걸. 얼른 여름 왔으면 좋겠다고. 지금 기분 잘 기억해뒀다가 겨울에, 추울 때 다시 써먹자. 잘 충전해뒀다가, 겨울에.”

“그럼 겨울 기억을 지금 써먹으면 되잖아요. 추울 때 충전해둔 기분 없어요?” - 염미정



산포라는 경기도 어딘가 (아마도 수원 근처)의 가상의 공간에서 주인공 삼 남매는 흰자 같은 '경기도민'이라는 이유로 사랑과 인생에서 조금 더 멀어진다. 노른자 땅 위의 서울 사람들보다 촌스럽고 투박한 사람들. 겨울을 혼자 나지 않기 위해 산포-서울을 반복한다. 극 중 몇몇 회상 장면을 제외한다면 초반부는 대체로 여름이다. 여름의 더위는 불쾌하나 싱그럽다. 겨울의 차갑고 황폐한 기분을 그때는 모른다.


“남자가 왜 없어요? 어? 이렇게나 많은데? 80점짜리를 찾으니까 남자가 없지. 상대가 80점이어도 모자란 20 때문에 남자 족치고, 더 괜찮은 남자 없나 짱 보고, 그러잖아요, 언니. 근데 무슨 아무나 사랑한다고. 난 텄다고 봐. 아니, 나는 20점짜리도 그 20이 좋아서 사귀는데? 20이 어디야? 좋은 게 20씩이나 있는데, 어? 어쩌다 30점짜리 만나면 '아이고, 감사합니다', 어? 40점짜리 만나면 대박. 그, 자기가 80점이라서 80점짜리를 찾는 거면 내가 이해를 해. 언니 솔직히 내가 몇 점짜리인지 얘기해 줘요? 오늘 아주 적나라하게 점수 좀 찍어 줘?” - 지현아가 염기정에게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 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 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 마디가 다 귀해.- 지현아가 염미정에게



초등학교 1학년 때 20점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시험지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 가야 했는데, 꺼내진 못하고 시험지가 든 가방만 보면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웠어요. 사인은 받아야 하는데 보여 주면 안 되는, 해결은 해야 되는데 엄두가 나질 않는, 지금 상황에서 왜 그게 생각날까요? 뭐가 들키지 말아야 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남자한테 돈 꾸어준 바보 같은 나인지, 여자한테 돈 꾸고 갚지 못한 그놈인지, 그놈이 전 여친한테 갔다는 사실인지. 도대체 뭐가 숨겨야 되는 20점짜리 시험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내가 20점짜리인 건지. - 염미정


노른자 땅의 80점짜리 짝을 찾아 나서는 사람과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하기에 샛길로 빠지지 않았으면 하나 20점짜리 답안지가 된 사람. 둘 다 같은 경기도민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인다는 말이 그래서인지 내 속을 쿡 찌른다. 부산이라는 흰 자에서 서울이라는 노른자로 이주하게 된 지금의 나. 요즘 나는 말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 하다가도 본능적으로 그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게 다 내가 촌스러워서 그래. 오늘도 20점짜리 답안지를 돌덩이처럼 들고 퇴근한다.




“왜 매일 술 마셔요?”

“아니면 뭐 해?”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 염미정이 술을 마시고 있는 구씨에게


“내가 뭐 하고 싶은 인간으로 보여? 너 내 이름 알아? 나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고. 내가 왜 이런 시골 구석에 처박혀서 이름도 말 안 하고, 조용히 살고 있겠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고.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너 남자한테 돈 빌려줬지? 사내 새끼들도 여우야. 돈 빌려 가고도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들 여자, 알아본 거라고. 뚫어야 될 문제를 뚫어. 엉뚱한 데로 튀지 말고.”

“미안하다, 나도 개새끼라서. 너는? 넌 누구 채워준 적 있어?. - 구씨가 염미정에게



귀뚜라미가 우는 겨울이 오기 전에, 20점짜리에서 머물기 전에 날 추앙할 사람을 찾는다. 지겹기만 한 노른자 땅에서 흰 자의 땅으로 의도치 않게 들어온 어떤 사람이 덩그러니 술만 마시고 있다. 교활한 여우가 아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보이는 사자 같은 사람이. 아니, 들개 한 마리가.


전 진돗개 같은 여자예요. 배신 안 때리고 쭉 가요. 남자를 지켜요. - 염기정이 박진우에게


“저희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 '집하고 짝은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때 되면 온다' 때 되면 옵니다! 내 꺼가 옵니다.”

“올까요?”

“옵니다.” - 박진우가 염기정에게


배우는 건 그만하고 싶어. 수영을 배우는 데, 자유형이 안 됐어. 근데 여럿이 하는 거니까 배영으로 넘어가고, 평영으로 넘어가고, 학교 수업이랑 같아. 난 구구단을 떼지 못했는데, 분수로 넘어가고. 그 뒤로 난 그냥 앉아 있는 거야. 동호회에서도 똑같은 짓 반복하기 그렇잖아. 그리고 나는 뭐 재밌는 게 없어. - 염미정이 사진 동호회를 제안하는 회사 동료에게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된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찾아야 될까? - 염미정


묵묵히 때 되면 찾아올 짝을 찾아 나서는 진돗개 같은 여자 기정.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더는 지친 나머지 여우 같이 구는 전남친을 개새끼라 되뇌는 미정. 시골에 가면 하염없이 엎드려 있는 개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목줄을 매고 있으나 그 줄이 가진 '지킴'의 의미가 공허한 진돗개와 어느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으나 그 자체로 위협이 되는 자연의 이질적인 오브제 같은 들개들. 견주도, 지나가다 보게 된 방관자들도 이들에게는 어떤 관심도 사랑도 건네지 않는다. 그들은 원래부터 덩그러니 그곳에 있던 것들이었으니까.


“내가 영화를 혼자 봐서 헤어진 걸로 만들고, 걔가 새벽에 딴 놈이랑 톡해서 헤어진 걸로 만들어야 돼. 절대로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인 거 그게 들통나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나도 알아. 걔가 쥘 수 있는 패 중에 내가 최고의 패는 아니라는 거. 더 좋은 패가 있겠다 싶겠지. 나도 알아. - 염창희가 염기정에게



94년생 개띠인 나에게 이 말이 가장 아프게 꽂힌다. 나도 알아, 내가 지금 당장의 최선의 패일 수는 있어도 네 인생의 최고의 패는 아니라는 걸. 나도 알아.




“우리 진짜로 하는 건 어때요? 해방클럽. 전 해방이 하고 싶어요. 해방되고 싶어요.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는데, 꼭 갇힌 것 같아요. 속 시원한 게 하나도 없어요. 갑갑하고, 답답하고, 뚫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해방... 좋다!” - 염미정이 조태훈과 박상민에게


“혹시 내가 추앙해줄까요? 그쪽도 채워진 적이 없는 것 같아서. 필요하면 말해요.
“...”
 - 염미정이 밭일을 하고 쉬고 있는 구씨에게



이제는 뚫고 나갈 때. 해방되어야 할 때!


“죄송해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밤만 되면 이 팔다리랑 목을 다 분해해서 깨끗하게 기름칠하고 아침에 다시 끼우고 싶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쉬지 않고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한 지칠 수 없거든요.” - 박진우가 염미정에게


“나는 갈망하다가 뒈질 거야. 사랑을 줘, 나도 줄게. 더 줘, 나도 더 줄게. 그냥 사랑만 줘. 배고파, 더 줘, 더 더 더. 세상 사랑을 다 쓸어 먹어도 안 채워질 거다. 너는 나처럼 갈구하지 마. 다 줘, 전사처럼 다 줘. 그냥 사랑으로 폭발해버려. - 지현아가 염미정에게


확실해? 봄이 오면 너도 나도 다른 사람 되어 있는 거?”
“확실해.”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 구씨가 멀리 떨어진 염미정의 모자를 줍고, 염미정이 자신에게 말해준 과거를 회상하며



지치기만 할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어색하게 견뎌내는 게 두렵고 그래서 누군가를 마주 보는 게 힘든 사람들, 해방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추앙의 의미는 무엇일까. 주고받음이 아니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폭발하는 사랑을 건네는 것. 마냥의 응원을 전하는 것.


“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이상하게 아버지 필체가 제일 아버지 같더라고요. 옷을 봐도 사진을 봐도 그냥 그런데, 필체는 이상하게 진짜 아버지 같았어요. 팬대 잡는 분이 아니셔서 전화번호 수첩 하나 있었는데, 그걸 매일 봤어요. 근데 수첩에 그런 글이 있었어요. '사나이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런 고민 안 하실 것 같은 분이었는데.” - 조태훈이 박상민에게


“끌어야 되는 유모차 있고, 보내야 되는 유치원 있는 그런 여자라는 건데, 뭐 적어도 내가 괜찮다 생각하는 여잔 그 정도 욕심은 내도 되는 여잔 건데, 근데 난 그걸 해줄 수 없는 남자란 거.” - 염창희



사나이가 된다는 것. 아버지의 나이와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욕심을 내지 못하는 아이러니. 노른자 땅에서 자란 온실 속 화초인 서울 남자와 맨 박스에 갇힌 부산 출신 남자인 나. 둘 다 20점짜린데 이왕이면 세련된 사람이 좋은가보다.


“저, 막내 따님 전화번호 좀...” - 구씨가 염제호에게


(문자를 통해)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 - 구씨가 염미정에게


“가짜로 말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잖아.”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 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해 봐요 한 번, 아무 말이나.”

“...” - 염미정에게 추앙하는 법을 묻는 구씨


용기를 내면, 된다고 말하다 보면 정말로 이루어진다. 자기 계발서 따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증명하는 사실이다.




“누구랑 있으면 좀 나아 보일까. 누구랑 짝이 되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지는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부모한테도 그런 응원 못 받고 컸어, 우리.” - 염기정이 지현아와 염미정에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쉽지 않다. 누군가를 추앙한다는 게. 남들처럼 그냥 무던하게, 평범하게 사는 게 맞나? 다들 그렇다고 말하니까 그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아리송하다.


“싫을 때는 눈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을 걸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을 들어줘야 하고 나도 쓸데없는 말을 해 내야 되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도 그런데.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 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 염미정과 구씨


“겨우내 골방에 갇혀서 마실 때. 자려고 하면 가운데 술병이 있는데, 그거 하나 저쪽에다 미는 게 귀찮아서 가운데 놓고 무슨 알 품는 것처럼 구부려서 자. 그거 하나 치우는 게 무슨 내 무덤에서 나와서 벌초해야 하는 것처럼 암담해. 누워서 소주병 보면 그래. '아, 인생 끝판에 왔구나. 다신 돌아갈 수 없겠구나' 백만 년 걸려도 못할 거 같은 걸 오늘 해치웠다. - 구씨가 염미정에게



그래서 사람들이 퇴근만 하면 술을 마시나보다. 24시간 중 생각하는 것을 끊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 견뎌야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함께.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끝에 도달한다. 그리고 블랙아웃 된 기억 뒤에 같은 하루를 반복한다. 나는 정말 해방되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다.


"난 그 말을 이해 못 해. 심장 뛰게 좋다는 말. 그 정도로 좋았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 뭐 그렇게 좋았던 적도 없지만... 내가 막 심장이 뛸 땐 다 안 좋을 때던데... 한 번도 좋아서 심장이 뛴 적이 없어.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뭔가 풀려난 거 같고. 처음으로 심장이 긴장을 안 한다는 느낌... 내가 이상한가 보지." - 염미정


"염미정 쟤가 정답이야. 좋을 땐 그냥 좋아. 근데 심장이 뛸 땐...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폭풍 치는 기대 심리? 이런 거... 내 건 그냥 내 건가 보다 해. 너 월급 들어오는 데 심장 뛰는 거 봤어? 내 건데 왜 뛰어, 내게 아닌데... 아닌 걸 알겠는데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그때 뛰는 거야 심장이... 너 봐라, 남녀관계도 똑같다. 결혼한 사람들 중에, 첫눈에 제 짝인 줄 알아봤다 이런 사람들 있잖아. 얘기 들어보면 그냥 보자마자 ' 음... 너구나' 이런대. 막 심장이 뛰는 게 아니고, 그냥 '음... 너구나' 그냥 내건 거야. 인연은 자연스러워 갈망할 게 없어. 내건데 왜 갈망해. 너 부자들이 명품 갈망하는 거 봤어? 그냥 사지. 내가 뭔가 죽어라 갈망할 땐 저 깊은 곳에서 이미 영혼이 알고 있는 거야. 내게 아니란 걸. 갖고 싶은데 아닌 걸 아니까 미치는 거야." - 염창희


심장이 느리게 뛴다. 심장이 느리게 뛸 정도로, 해방될 정도로 좋다. 그 사람은 내 것이다. 반면 심장이 뛰게 좋은 사람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잘하면 내가 가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되려 더 못 가지게 된다. 내 영혼이 이미 알고 있기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다. 원래 내 것을 가져야겠다고 갈망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조급 해지는 것이다.


"돈 문제 얽히면서, 나 보자마자 골치 아픈 얼굴 하는 거 견뎠어. 짜증스러운 얼굴 보면 다 내가 잘못한 거 같고 꿔간 거 달라고 하는 것도 죄진 것 같고, 그냥 이런 일로 엮인 거 자체가 다 내 잘못 같고, 어쩔 수 없이 나 이래. 문제 있는 남편이랑 사는 거 이해 안 된다고 도와준답시고, 억지로 다 뜯어내는 사람들이 난 더 이해 안 가. 제발 그냥 두라고, 내가 아무리 바보 멍청이 같아도 그냥 두라고, 도와달라고 하면 그때 도와달라고. 사람하고 끝장 보는 거 못하는 사람은 못한다고. 얼굴 붉히는 것도 힘든 사람한테 왜 죽기로 덤비래?"

"나한텐 잘만 붉히네." - 염미정과 구씨



아낌없이 베풀었던 내 마음도, 분명 빚진 건 당신인데도 내가 죄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이래서 빌릴 때는 꼿꼿이 돌려받을 때는 엎드린다는 말이 있나 보다. 돈도, 감정도 왜 좋은 마음으로 건넨 사람이 얼굴을 붉혀야 할까. 그럴 때면 심장과 말이 느린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기에, 추앙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도와 달라는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나를 더 높이 추앙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을 사람이.




"이 사람은 껍데기가 없어."

"'이 사람'이래 '이 사람'!"

"그게 뭐?"

"너 '그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여기 없는데, '이 사람'이래...(미정 가슴에 손을 얹으며) 여기에 있다는 거지!" - 염미정과 직장동료


"그 사람한테 추앙하라고 했대. 대단하지 않냐? 염미정."

"그 남자 문제 많지? 느낌이 그러네. 왠지 그 남자 살리려고 한 말 같다. 염미정." - 염창희와 지현아


"투명해."

"너 지금 나 추앙하냐?"

"응." - 염미정과 구씨



this와 that의 차이를 만드는 사람, 내 심장을 느리게 뛰게 만드는 사람. 날 추앙하라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동시에 당신을 추앙하고 구원하고자 했다. 껍데기가 없이 알맹이만 있는 사람이라 그렇다. 내 것임을 알게 된 모든 사랑이 그렇게 된다.



"올 겨울엔 정말 사랑하겠구나..."

"하겠네요. 진짜로" - 염기정과 박진우


"난 왜 백화점에서 무리 지어 쇼핑하는 내 또래 여자들이 그렇게 꼴 보기 싫을까?"

"돈 쓰러 나왔으니까. 남편도 있을걸? 애도 있고."

"그 여자들 앞에서 그 여자들이 못 사는 아주 비싼 걸 사서 기를 팍 죽이고 싶어. 제일 섹시하고, 제일 멋진 옷도 제일 잘 소화하는 몸매이고 싶어."

"나는 그 무리 지어 다니는 여자들보다 4인 가족이 더 꼴 보기 싫어. 어우, 그 철옹성."

"우리도 가족에서 나왔는데?"

"우린 식구들끼리 절대 안 돌아다니지. 미쳤냐? 집구석에서 보는 것도 징그러운데. 우리는 꾸리는 집구석도 우리가 나온 집구석이랑 똑같을까?"

"똑같아. 똑같아. 근데 그걸 또 하고 싶어 해. 이 미련 곰탱이 같은 인간이." - 염기정과 친구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과


"옛날에 TV에서 봤는데. 미국에 유명한 자살 절벽이 있대. 근데 거기서 떨어져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 인터뷰를 했는데 하나 같이 하는 말이. 2/3 지점까지 떨어지면 죽고 싶게 괴로웠던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낀데.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죽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발을 뗐는데, 몇 초만에 그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느낀데. 그럴 거 같았어. 그래서 말해줬어. 사는 걸 너무너무 괴로워하는 사람한테, 상담은...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고 2/3 지점까지 떨어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상담받아 보라고 했는데 그냥 떨어져 죽었어."

"누가."

"같이 살던 여자가. 맞아. 죽으라고 한 얘기야. 하... 너무너무 지겨워하는 여자를 보는 게 너무너무 지겨워서. 그만하려면 그만하고. 추앙. 취소해도 돼." - 염미정과 구씨



2/3 지점을 향해 추락하는 사랑.


"둘 다 안됐어요. 나도. 내가 너무너무 싫어하는 여자도. 승진이 안돼서 또 1년을 봐야 돼요. 끼리끼리는 과학이라는데, 왜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걸까.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았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쏟아내고 나니까 좀 뚫린 것 같아요. 비록 승진에선 미끄러졌지만, 팬티를 더럽히지 않고,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근데 이렇게 작게 얘기하니까.. 우리 참 다정한 사이 같아요. 끼리끼리는 과학인데, 우린 뭘 하기로 예정된 사이일까요?" - 염창희가 구씨에게



그리고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너는 본능을 죽여야 돼. 도시로 가서 본능을 무뎌지게 해야 돼. 그래서 개구리 터져 죽은 얘기 같은 거 말고 여자들 수박 겉핥는 얘기. 그런 지겨운 얘기를 정성스럽게 할 줄 알아야 돼. 지겹고 지겹게. 그래서 남자가 지겨워서 죽고 싶게. 본능이 살아 있는 여자는 무서워. 너... 무서워." - 구씨가 염미정에게


"내가 무서워? 그 사람이 내가 무섭대."

"그 인간 너한테 읽히나 보다." - 염미정과 지현아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나이를 쫄게 만드는 여자. 들개처럼 달려드는 여자는 본능을 무뎌지게 만드는 노른자 도시가 싫어 흰 자의 남자를 추앙하게 됐다. 그러나 표정 하나 읽을 수 없는 남자는 여자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들통난 듯 군다.


"할 말 없나?"

"웬일이냐 지겨운 여자들이 하는 얘기를 다 하고. 할 말 있으면 네가 해. 여자들은 꼭 맡겨 놓은 거 있는 것처럼 툭하면 뭘 달래. 내가 너한테 빚졌냐? 뭐 마냥 좋을 줄 알았냐?"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

"다이아몬드가 더 쉬워. 추앙이 뭐냐? 난 몰라."

"븅신 누가 다이아몬드 달래? 들개한테 팔뚝 물어뜯길 각오하는 놈이 그 팔로 여자 안는 건 힘들어? 어금니 꽉 깨물고 고통을 견디는 건 있어 보이고, 여자랑 알콩달콩 즐겁게 사는 건 시시한가 보지? 뭐가 더 힘든 건데? 들개한테 물어뜯기도 코 깨지는 거랑 좋아하는 여자 편하게 해주는 거랑 뭐가 더 어려운 건데? 나보고 꿔 간 돈도 못 받아내는 등신 취급하더니 지는..." - 염미정과 구씨



지겨워지라고 했으면서. 지겨운 여자들이 하는 말을 하냐 일갈하는 남자. 틀린 말은 아니다. 꼭 빚쟁이처럼 감정도 되돌려 받으려고 하니까. 좋은 일만 있겠나. 인생이 원래 그렇다. 다이아몬드를 구하는 게 차라리 쉽지. 감정도 썩는 물질이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사나이 답지 못하니 얼굴을 붉히게 된다.


"허... 야 이름 부르던 게 목으로 넘어가냐?"

"이름 없었어. 잡아먹을 건 원래 이름 지어주지 않아."

"야 너 씨... 나 빨리 이름 지어줘! 나 잡아먹지 못하게."

"구씨잖아~" - 염미정과 구씨


이제는 이름을 불러주길, 이름을 지어주길 바라는 사람.



"행복하자고 모인 모임이니까. 저희 인생을 좀 정직하게 들여다 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3가지 강령을 정했습니다."

"아 네..."

"일.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이.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삼. 정직하게 보겠다." - 해방클럽


"내가 작가나 해볼까 하고 잠깐 작법책 본 적 있는데 좋은 드라마란 주인공이 뭔가를 이루려고 무지 애쓰는 데 안 되는 거래. 그거 보고 접었어. 인생이랑 똑같은 걸 뭐하러 써. 재미없게." - 지현아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지 않다. 


"이름이 뭐든,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여도, 외계인이어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근데 그게 뭐? 난 아직도 당신이 괜찮아요. 그러니까 더 가요. 더 가봐요. 아침 바람이 차졌단 말이에요." - 염미정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정직하게 보겠다.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랬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 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 상에서 다 사라져 버려야 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랬어.

당신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 - 염미정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니까요. 어느덧 겨울이 오고 있어요.




"미정아! 염미정!"

"(삼식이가 뛰어들어온다.) 부르셨습니까?"

"미정아 너 뭐하고 싶니?"

"예?"

"내가 기분이 기깔나게 좋아지고 싶은데 뭘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네가 원하는 거 해줄게. 너 뭐하고 싶어?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 뭐 그런 거 없어? 말해 봐."

"집에 가고 싶습니다! 나주에 있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 - 삼식이와 구자경



춘자, 우빈, 미정. 잊고 싶어 아무런 이름이나 외치던 사나이가 원하는 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깔나게 좋아지기 위해, 똑같은 하루의 반복인 노른자 땅에서 오늘은 이런 일이 벌어져야 한다.


"1대 다수일 때는 항상 1이 거슬려. 다수는 1을 거슬려하지 않아. 1은 늘 경계태세야. 1이라. 너만 만나면 이상해. 생각지도 못한 말이 줄줄 나와."

"우린 2야? 아니면 1대 1이야?"

"너 나 경계하냐?"

"진작 전화하지, 씨." - 구자경과 염미정


"당신 말대로 1대 다수를 감당하면서, 축복하는 다수 속에 재 뿌리러 가는 1이 되기로 하고 1이 되자. 완전한 1이 돼보자. 사진사가 신랑 신부 친구들 나오라고 하길래 일어나는데. 그때 전화가 왔어.. 이 사람 날 완전히 망가지게 두진 않는구나. 날 잡아주는구나." - 염미정


2가 된 사람들. 아직 합이 되지 못해 본 사람들. 1로 머물며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지도해줄 수 있는 사람들. 하루에도 백만 번씩 마음이 변하지만 우리는 다수를 상대하는 1 혹은 2다. 언젠가 들개 같은 당신 앞에 초라한 개새끼가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점은 영원히 기억된다.



"응. 뭐 여전히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가는 거냐? 가보자.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 구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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