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찬우 Aug 03. 2020

잠금 해제

패턴인식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다음은 약간의 불신이었다.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을 땐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죄책감 앞에 자그마한 위안을 첨부한다. 남자 친구니까. 평소 휴대전화로 뭘 하고 사는지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나도 좀 궁금해할 수 있잖아?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린다. 여기서 화장실까지는 거리가 꽤 머니까. 걔가 손을 씻고 돌아올 때쯤엔 한참 동안 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척, 태연하게 연기하고 있으면 되겠지. 오케이. 시간은 충분하다. 화면을 켠다. 밀어서 잠금 해제.


단체 채팅방은 달랑 한 개뿐이었고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 전부였다. 친구가 별로 없다는 건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외로운 사람이었을 줄이야. 언젠가 그녀가 내 너저분한 카톡 창을 슬쩍 훔쳐보곤 지나가듯 톡 떨어트려놓은 말이 떠오른다. "눈에 거슬리지 않아? 난 그래서 채팅 기록을 수시로 지우는데." 그게 아마 그녀의 커다란 콤플렉스를 숨기려는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불현듯 내 머릿속에서 무자비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설마 그 많은 기록들을 정말 일일이 다 지웠겠어?


단체 채팅방은 동창생 그룹인 것 같았다. 그들이 나눈 시답지 않은 대화들을 조금 올려보니 언젠가 내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번에 걔는 얼마나 만날 것 같아? 
모르지. 일단 만나고 싶을 때까지.
쟤가 만나봐야 얼마나 만나겠어. 


흥하고 웃어넘기다가 다음 한 줄에서 멈칫했다. 


근데 걔, 너보다 어리다며? 능력도 좋다. 잘생겼니?


만나고 싶을 때까지, 어리다, 잘생겼냐는 물음들 중 어느 것이 내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연인의 사생활을 반드시 지켜줘라'는 말이 어쩌면 상대방이 아닌 나를 배려하기 위한 연애 조언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걸 그제야 몸소 깨닫게 되었다. 하필 그때의 나는 지나치게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이 유약한 마음에 침투한 하나의 의심은 결국 거대한 불신의 나무를 자라게 할 테니. 싹부터 밟아버리기로 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그녀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자 나는 기록의 염탐을 고백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고 그럴듯한 변명보단 문제의 원초적인 근원을 제공한 나를 끔찍하게 비난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갔다.


나는 "둘 다 잘못했지만 뭐, 어쨌든 내가 더 잘못했으니 사과할게"라는 찌질함을 보였고 그녀는 "내가 너 같은 놈 주려고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싼 줄 알았느냐"라는 매우 모욕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누가 이별의 증거를 척력이라고 말했는가. 나는 강력한 인력의 소용돌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휘둘렸다. 어찌어찌 화해하긴 했고 그런 의미로 섹스하기로 했을 때 평소보다 더 감정을 실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인제 와서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내 균형감각을 찾기 위해 그 순간만큼은 잠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의 휴대전화를 훔쳐보는 것을, 마찬가지로 누군가 내 휴대전화를 훔쳐보는 것을 극도로 주의하게 됐다. 정말 좋아했던 한 동생과 밥을 먹으러 가다 길을 잃어 지도 앱을 켤 때도 몸을 돌려 액정을 가렸다. 어떤 술자리에선 술에 잔뜩 취해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올려놓곤 당시 연락하던 여자의 전화번호가 환한 연두색 배경 위에서 웅웅 거리고 있음에도 혼자만 뒤늦게 알아차려 부끄러움에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화제를 전환하기도 했다. 그냥 싫어진 거다. 무언가 남이 모르는, 굳이 알 필요도 없는 내 사생활의 일부가 우연이든 계획적이든 슬쩍 드러나는 것이 말이다.


이석원은 그의 책 <보통의 존재>에서 사랑은 '패턴'이라고 말했다. 만남도, 이별도 우리는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늘 같은 범주 안에서만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몇 달 전 산책을 하다 우연히 그녀를 봤다. 헤어진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공기의 분위기에서부터 애써 나를 못 본 체하는 게 느껴졌다. 말을 걸까 말까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결국, 늘 그랬듯이 말을 걸지 않았다. 내 마음속 어딘가에 굳게 잠겨있는 기록을 굳이 다시 해제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비밀번호도 잊어버렸다. 어쩌면 패턴인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그녀만의 패턴.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나만의 패턴.

매거진의 이전글 선 섹스 후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