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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07. 2020

선 섹스 후 사랑

이해는 무슨

나는 사랑도 클럽이 아닌 도서관에서 스며든다고 믿으려 하는 사람이다. 무릇 '사랑'이라고 하면 어딘가 사람을 콩닥콩닥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원나잇은 내게 전래동화 같았다.


사실 원나잇이란, 특히 남성들에게 있어 커다란 판타지다. 나 또한 원나잇이 그저 내 바운더리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뿐 그런 상황에 도달한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정하기 싫어도 남성들의 세계 안에서 원나잇이란 본인의 남성성을 어필하는 최고의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 또, 질척거리지 않는 일시적인 쾌락이 탄생하는 것에 굳이 쌍심지를 켜고 반대할 만큼 양심적이지도 못하니까. 여기서 '양심적'이란 표현이 과연 옳은가 잠시 고민하게 된다. 뭐가 양심적인 건데.


E는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지 가끔 술 한잔 할 때마다 바로 직전의 원나잇 경험을 이야기한다. 대상도 매번 바뀐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원나잇을 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여자 측에서도 이후 별 말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그냥 대화 잘 통하고 마음 잘 맞고 술 들어갔으니까 한 번 하는 거지"라는 E의 주장에는 딱히 반박할 부분도 없었다. 젊은 남녀가 눈 맞으면 섹스할 수도 있지. 암. 그러나 원나잇은 내 소유물이 아닌 무언가를 잠시간 점거하기에 짜릿한 동시에 끔찍한 경험이기도 하다. 이것은 유경험자인 E와 무경험자인 내가 합심해서 작성하는 감상평.




그렇다면 그 이후의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E는 그렇게 만났던 몇 명의 여자들과 몇 번 더 잠자리를 가졌다. 첫 섹스와는 다르게 그녀들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의하려고 했다. E는 그렇게 그중 몇 명과 연애를 시작했다. 또 그중 쿨한 몇 명과는 그저 친구로 지냈고 또 그중 몇 명에게는 잠수를 탔으며 딱 한 명에게는 고소 협박을 받았다.

 

'선섹후사'라고 불리는 '선 섹스 후 사랑'이란 진보적인 연애관은 항상 누군가의 이해를 요구했다. 막상 당사자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주변 방관자들이 더 길길이 날뛰며 그들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걔네 섹스 몇 번 하고 사귄 거라던데?" 사람들은 공공연한 자리에서는 "뭐 그럴 수 있지"라며 짐짓 쿨한 척을 한다. 하지만 뒤에서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이 입방아에 오른다. 혹은 그저 마음속으로 비웃는다. 아무리 서구권의 문화가 당연한 시대라 해도 대한민국 안에서는 섹스란 자고로 신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부터 했다고? 에잉 쯧쯧.


그래서인지 나에게도 '선섹후사'는 어딘가 거북하다. 이런 면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인가 보다. 연애 이전에 섹스를 한다는 것은 연애 이후에도 섹스를 최대한 늦추려는 내 가치관과는 잘 맞지 않는다. 그렇다. 나는 연애를 시작하고도 곧장 섹스를 하려 들지 않는다. 섹스는 연애의 수명을 갉아먹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래서 첫 연애가 중요하다.


내 경우에 있어 대부분의 섹스는 진취적인 여자 친구들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나는 최대한 그 기한을 연장하려 했지만 2주를 채 넘기지 못했다. 왜 이리 보수적이냐는 핀잔과 함께 훅 들어오는 유혹을 뿌리칠 정도의 성인군자는 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콘돔이 없어 할 수 없다는 내 거절에도 바지를 벗기던 한 여자 친구 때문에 성인의 섹스란 교제 이후 2주 안에는 무조건 발생해야 하는 이벤트라는 인식이 내 머릿속에 콕 박혔다.


하지만 슬프게도 섹스는 내 연애의 수명을 갉아먹는 게 맞았다. 물론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했으나 가속화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에게 있어 섹스란 이별이 다가옴을 알리는 목욕탕의 모래시계였다. 그렇다고 내가 섹스 혐오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환장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니 이것은 그저 유전적인 문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언젠가 내 동생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때 소름 돋을 정도로 우리 형제는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엄마에게 비혼 주의를 선언했다.




이 또한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일반화이지만 섹스의 형태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콘돔을 철저히 사용하고 애무에도 공을 들이는 타입이다. 하지만 원나잇을 자주 하는 이들치고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드물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체외 사정을 했고 애무 없이 무작정 삽입을 시도하는 괴팍함을 보였다. E 또한 그랬다. 섹스에 있어 나는 지쳤고 E는 즐거웠다.


'원나잇'과 '선섹후사' 모두 이제는 은근하게 인정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훈수까지는 아직 피해 가지 못한 것 같다. 특히 원나잇이 그렇다. 이보다 더 내밀하지만 정규적인 '파트너십'은 더욱 죄악시된다. 그보다 더한 사태들이 많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어쨌든 연인의 형태가 되는 선섹후사에는 비교적 관대해졌다. '속도위반 연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렇게 선섹후사와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나 또한 나이가 들면서 선섹후사를 경험하게 됐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수많은 장점을 열거하던 E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제야 이해했다. 속궁합을 먼저 맞춰보는 것은 연애에도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섹스를 이미 했기 때문에 섹스를 늦출 필요도 기대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선섹후사'란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의 연애일지도 모른다. 영양가 없는 말들로 서로를 떠보기만 하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닌 그때 그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것.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주는 상상력은 절실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현실적이나 적당히 과장된 세계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섹후사는 지금의 나에겐 만화책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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