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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Jul 25. 2020

<섬 (Queen of Diamonds)>

권태의 말로는 밀물뿐인 섬


윤리를 저버린 사랑은 왜 비난을 받는가



검정치마가 한국 음악 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여러 인터뷰 매체를 통해 그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했고 알게 모르게 그의 음악적 자식들이 곳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3집 <THIRSTY>는 여러모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품이다. 아주 오랜만의 신보였으나 가혹하게도 현시대의 시대정신과는 꽤 많이 위배되는 주제의식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는 앨범 소개란을 이렇게 꾸몄다.


뻔뻔하고 그로테스크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에겐 하나같이 다 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처럼 들린다. 하긴, 전부 다 내가 지어낸 얘기라고 해도 영원히 알 순 없겠지.


나는 종종 의문을 품는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윤리를 저버린 행동을 한다. 최소한의 도덕 기준인 법의 체계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선을 넘는 윤리'란 어쩌면 횡행하는 무단횡단처럼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익명에 기대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 있는 시스템적 환경이 구축되자 인터넷 세상 속의 우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선비들에게 끊임없는 '윤리 훈수'를 받게 되었다. 그들에게 권태 잘못이며 바람은 씻을 수 없는 죄악이다. 그들 본인도 결국 형태만 다를 뿐 저마다의 '윤리를 저버린 사랑'을 행해왔으면서 말이다.


가사도우미에 앞서 필자는 본 곡의 가사를 해체하는 과정에 있어 검정치마가 앨범 전체에 설계해놓은 '유기성'을 꽤 많이 무시할 것이다. <섬>을 철저하게 '개별의 트랙'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_tMEXd8Zow




권태 1


[PART A]


밤이 오려나

나 방금 일어나려 했는데

해가 짧아지면

하나씩 들어오는

불빛이 쓸쓸해


‘지금 무슨 생각해?’

티비가 시끄럽게 울려도

니 말이 짧아지면

비좁은 마음속엔

걱정만 커져



첫 파트의 가사는 '풍경'을 만든다. 밤이 온다. 곡 속의 화자는 이제야 일어나려 했는데 말이다. '일어남'이란 단어 자체가 어색한 시기인 '밤'을 역설적인 방법으로 배치한다. 밤이 오면 해가 짧아지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온다. 화자는 이에 쓸쓸함을 느낀다.


화자는 누군가에게 묻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질문을 받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동시에 그저 생각에만 머무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은따옴표는 지극히 의도적이다. '지금 무슨 생각해?' 밤의 풍경은 'TV가 있는 방'으로 이동하고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있는 듯한 연인이 떠오르는 미장센 안에서 누군가 대답/질문한다. 화자는 무어라 대꾸하는 것을 들었고, 시끄러운 TV 소리에도 너의 짧은 말 때문에 마음속엔 걱정만 커져간다.


요새 사람들은 TV를 보지 않는다. TV는 이제 '그냥 켜놓는' 물건이다. 왠지 쓸쓸해서. 할 말이 없을 때 멍하니 바라보기 좋아서. 혹은 잡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시끄럽게 켜놓은 TV도 화자의 마음속의 걱정은 잠재울 수 없다. 이때의 TV는 오히려 쓸쓸함을 더욱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저 상자 안 속의 누군가는 끊임없이 떠들지만 '우리'의 대화는 점점 짧아진다.




권태 2


[PART B]


힘만 빼려나

난 그냥 나가는게 좋겠네

어차피 지나갈 거

새벽에 돌아오면

잠들어 있겠지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샤워기 물소리만 대답해

젖은 내 양말보다

질척한 마음속엔

2등이 떠올라



훅을 잠시 건너뛰고 두 번째 파트다. 시끄러운 TV 소리 사이로 점점 짧아지는 대화 끝에 화자는 '그냥 나가려고' 한다. 힘만 빼기 때문이다. 어떤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서사이다. 이 또한 '어차피 지나갈 것'이고 잠시 나갔다 새벽녘에 돌아오면 너는 잠들어 있을 것이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A 파트와 마찬가지로 화자는 질문/대답/생각한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앞서 A 파트에서는 비교적 '너'의 대답을 통해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엔 대답을 샤워기 물소리가 받았다. 이 상황에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의 마음은 젖은 양말보다 질척하고 마음속에는 '2등'이 떠오른다.


B 파트의 마지막 라인에는 필자가 이전의 글에서도 누차 강조했던 '물의 속성'이 등장한다. 본 곡의 제목인 '섬'은 물에 둘러 쌓여있는 일부를 말한다. 사방이 물로 막혀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를 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비슷한 속성의 측면에서 등장한 '샤워기 물소리'와 '젖은 양말'은 2등을 떠올리는 화자의 '질척함'을 설명하기 위한 빌드업인 동시에 '섬'으로 묘사되는 '너'와 화자가 동류의 사람임을 뜻하기도 한다.


프로덕션 적으로도 재밌는 측면이 있다. A 파트와 B 파트는 구조적으로 유사한 동시에 대비된다. 각 파트의 첫 가사인 '밤이 오려나'와 '힘만 빼려나'의 유사성과 작은따옴표 안의 주체가 모호한 말들의 유사성을 통해 가사의 구성을 통일했다. 동시에 각 파트가 내포한 화자의 상태는 대비된다. A 파트는 '1등'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을 표현했다면 B 파트는 '2등'에 대한 일종의 탐미를 표현했다.


'2등'이란 표현도 어딘가 석연치 않다. 아마도 연인 간의 권태를 표현한 듯한 A 파트를 미루어 해석해본다면 2등은 당연하게도 화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어떤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권태 뒤에 바람을 피우고 있다면 기존의 1등이 2등이 되고 새로운 2등이 1등이 되어야 맞지 않은가. 이는 어쩌면 화자가 가진 죄책감이 새로운 사랑에 대한 탐미보다는 더 큼을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겠다.




썰물이 없는 섬


[Hook]


너 사는 섬엔 아직 썰물이 없어

결국 떠내려온 것들은 모두 니 짐이야

이어질 땅이 보이지 않네


너 살던 섬은 이제 가라앉았고

내가 두고 온 것들은 다 저기 저 아래에

녹만 슬다 없어지겠지



곡의 가장 주된 정서를 담은 매개물인 '섬'은 화자의 '너'가 표류하게 되는 곳이다. 내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1등의 네가 사는 섬에는 아직 썰물이 없다. 썰물이 없는 섬에는 밀물 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떠내려온 것들'은 모두 너의 짐이 될 것이다. 밀물은 바다의 쓰레기를 해안가로 몰고 오지만 썰물은 그 쓰레기를 다시 바다로 가져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썰물 없는 화자의 감정은 이기적 이게도 '너'의 짐이 된다. 권태로 2등을 만났으면서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다. 밀물뿐인 섬은 결국 침수되기 마련이다. 물에 잠식된 섬에 이어질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네가 살던 섬은 가라앉을 것이다. '너'의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이다. 밀물에 가라앉은 섬에 있던 '내가 두고 온 것들'은 '떠내려온 것들'과 비슷한 듯 다르다. 하지만 이 또한 결국 가라앉은 섬과 함께 저기 저 아래에서 녹이 슬다 사라질 것이다. 완전한 소멸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분히 은유적인 훅이라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한 군데 있다. 바로 '떠내려온 것들'과 '내가 두고 온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 다르다. 떠내려온 것은 일반적으로 자의적이지 않지만 내가 두고 온 것은 자의적이다. 분명 어떤 감정을 비유한 것으로 느껴지는 표현인데 너무나 세세한 감정의 층위를 표현하는 듯해 해석이 어렵다. 필자는 이를 권태 전후의 감정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떠내려온 것들은 '화자'가 2등을 만나 저지른 불륜 후의 죄책감이다. 이기적 이게도 화자는 본인의 죄책감마저 '너'의 짐이 되게 한다. 내가 두고 온 것들은 '화자'가 불륜 전에 1등과 나눈 사랑의 기억이다. 화자와 너 또한 2등의 개입 이전에는 불타는 사랑을 했겠으나 이 기억은 이제 고스란히 가라앉았다.




Queen of Diamonds


[Bridge]


you are my baby, but you ain’t no kid

speak up now don’t shut your lid

monolids blinking at me,

i hear nothing, just tell me something

anything



본 곡의 후반부는 느릿한 템포의 전반부와 다르게 급속도로 휘몰아치는 로큰롤로 변주한다. 필자는 앞서 본 곡을 개별 트랙으로 해석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본 곡의 전후를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 또한 하나의 장치로써 트랙 간의 유기성을 만들었다.


화자에게 '너'는 baby이지만 kid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연인의 애칭으로 사용되는 baby를 가지고 만든 일종의 워드 플레이로 느껴진다. 너는 내 아기지만 애는 아니라니. 끝난 사랑에 잔인한 종지부를 찍는 데 이보다 더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라더니.


바로 다음 라인에서는 말하라고 한다. lid를 닫지 말고. 일반적으로 lid는 '뚜껑'이라는 뜻이지만 바로 다음 라인의 monolids(홑꺼풀)과 연관 지어 보면 이 또한 '눈'이라고 해석하는 방향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 라인도 일종의 워드 플레이가 된다. 눈 하나 깜빡하지 말고 나를 보고 말하라고. 하지만 바로 다음 라인은 아마도 '너'의 행동으로 추측되는데. '너'는 홑꺼풀의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본다. 분명 눈을 감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다. 이 아이러니는 바로 이어지는 라인을 통해 극대화된다. 화자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just tell me something anything. 뭔가 말해줘. 뭘?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이쯤 되니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 브릿지는 '1등'인 네가 아닌 '2등'인 불륜의 대상에게 건네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곡의 부제인 'Queen of Diamonds'는 우리가 흔히 트럼프 카드라고 부르는, 도박을 하기 위해 사용되는 52장의 카드 묶음 한 벌에 존재하는 다이아몬드 퀸을 뜻하는 것 같다. 이 다이아몬드 퀸은 거만하고, 질투심이 많고, 사악하고, 난잡한 여왕이다. 이 여왕은 '고립'과 '당신의 적'을 의미한다. 그녀는 말이 매우 많으며 남자를 조종하는 데 능숙하다. '사랑'의 관점에서 'Queen of Diamonds'는 누군가가 당신의 연인 혹은 배우자를 훔치고 싶다는 경고 신호이기도 하다.


이 <섬>엔 과연 누가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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