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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Aug 11. 2020

<지구 멸망 한 시간 전>

매 순간이 멸망의 시간


지구 멸망



종말은 상상할 수 없는 그 파괴력이 가진 무시무시함과 다르게 어느 시대에나 매력적인 주제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마야인들의 예언은 각각 1999년과 2012년의 지구에 기대감을 심었다. 공포감이 아니다. 사람들은 내심 '진짜 내일 지구가 멸망할까?'라고 상상하면서도 그에 대한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구 멸망이란 SF 영화를 통해야만 간접 체험할 수 있는 '허상'에 불구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백보 양보해 만약 한 시간 뒤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떨까. 여러분은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기뻐할 것인가? 두려워할 것인가?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지하벙커를 찾아 나설 것인가? 아니면 그저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내 인생을 겸허히 정리할 것인가?


우선 궁금하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앞둔 우리는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까. 어차피 한 시간 뒤면 이따위 지구는 멸망할 텐데 존엄성 따위가 무슨 대수겠는가. 거리에는 약탈과 방화, 강간과 살인이 일어날 것이며 사람들은 종말을 두려워하기 앞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집의 대문을 걸어 잠그는 것으로 종말은 시작된다.


종말의 범위를 제한해보자. 과연 '종말'이란 무엇인가. 운석이 떨어지고 해일이 일어나 지평선과 수평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물리적인 종말이 아닌 '일상의 종말'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제이클레프의 본 곡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의 가사도우미는 정식 음원 버전이 아닌 네이버 온스테이지 라이브 버전을 기준으로 진행할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YlKY4EImAWM




지구 멸망의 순간


[PART A]


봐 

곧 주위가 해가 뜬 것처럼 밝아지고 

사방에서 운석이 나리고 

방해받는 전파는 

우리 

소식을 어디도 

걸어주지 못해 퍼져 나가지 

어딜 봐도 피할 여지없고 지켜봐



곡의 시작 상황은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다.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운석 때문에 주위는 곧 해가 뜬 것처럼 밝아질 것이다. 운석은 전파 또한 방해한다. 실제로 2000년 1월 18일, 캐나다 유콘 지역의 사례를 참고해보면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자 전자기 펄스에 의해 전기공급이 순간적으로 중단됐다. 그렇게 전파는 우리의 재난 소식을 어디에도 전달하지 못하고 공중분해된다. 어딜 봐도 피할 여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구 멸망을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곡의 시작 부분에 툭 떨어트리는 '봐'는 초연하기만 하다.



봐 

아름답지 않아 

일궈온 것들 모두 다 

무색해지는 순간을

면하지 못하고 넌 

여길 벗어나자 하지만 

나는 제일 처음으로 마중 나가고파 

피하기 위한 Shelter는 없지 

물고 있을 담배 한 개비 

외엔 아무것도 챙기지 말지 

아끼는 건 다 폐기해 뒀지 

그냥 나랑 가자

스러지는 선두에나 서고 말야

앞에 뒀으니 너를 

카운트 다운은 네 박동으로 하지



지구가 멸망하는 그 짧은 순간 화자가 본 풍경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인류가 일궈놓은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순간 화자의 '너'는 여길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나 화자는 다르다. 초연하게 이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제일 처음으로 마중 나가려 한다.


화자는 피하기 위한 'shelter'는 없으니 담배 한 개비 물고 이 종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진작에 아끼는 건 다 폐기해 뒀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다. 그러곤 너에게 같이 선두로 나서자고 말한다. 종말의 선두에 선 그들. 화자의 앞에 서 있는 '너'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한다. 운석이 떨어지기 바로 직전을 세는 카운트 다운을 이 심장박동이 대신한다.


종말을 면하기 위해 달아나려는 '너'를 붙잡은 채 두려움에 떠는 그의 심장박동을 카운트 다운으로 여긴다는 표현은 어딘가 모르게 잔인하다. 피난처를 뜻하는 'shelter'와 '쉴 터'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멸망은 지극히 은유적이다. 종말을 피하기 위한 피난처이자 쉴 터가 없다는 뜻은 자연의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작은 개인이 겪는 '타의적인 죽음'을 더욱 극대화한다.




운석 앞의 사랑


[Hook]


아마 너는 모를 거야 Just 

나의 허망함이 두려 울지도 

오늘이 아니어도 

매 순간은 어차피 

운석 드리우는 삶이야 

영원히 산다면 

사랑은 눈 앞의 

고만 고만한 것 

창 밖을 봐 

욕망을 드러내는 시간 

가장 허무한 우리는 

추하지 않을 거야



훅은 본 곡의 주제의식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대명제로써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다.


화자는 말한다. 아마 너는 모를 것이다. 나의 이러한 허망함(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가 멸망하는 오늘이 아니어도 매 순간은 어차피 운석이 떨어지는 삶과 같다. 화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종말이었던 것이다. 매일이 죽음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아끼는 걸 미리 폐기해둔 것일까.


'지구 멸망'과 대비되는 표현이 붙는다. '영원히 산다면'은 운석으로 인해 한 순간에 멸망하는 지구와 비슷한 듯 다르게 '인간(사랑)의 소멸'을 비유한다. 영겁의 시간 앞에 사랑은 고만고만해진다. 세상을 무너뜨리는 파괴 또한 세상을 고만고만하게 만든다. 지구가 멸망하거나 말거나 '사랑'이란 결국 소멸하는 것이다.


화자는 다시 한번 '봐'라고 제안한다. 창 밖을 보면 세상이 무너지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은 욕망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어떤 욕망일까.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비양심적 행동? 이를 가만히 지켜만 보는 그들은 '가장 허무한 욕망'을 드러내지만 저들에 비하면 우리는 추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허무한 욕망은 무엇인가. 당연하게도 '사랑'이다.




피난처


[PART B]


신앙이 지켜주는 이들은 모여
다음 생, 모습까지 소망하며
이방인인 나의 미래까지도
기도해 주지만 나의 훗날은 아무렴 좋지


대가를 치르고 살았지 나의 죄여
내 믿지 않는, 창조주여
거기 있다면 이제 거두 소서
담엔 태어나겠느냐 물어 주소서



재난의 범위가 확장된다. 그저 '너'와의 관계를 정의하던 A 파트와 달리 B 파트의 시작에는 '신앙심'이 개입된다. 신앙이 지켜주는 종교인들은 종말 앞에 기도한다. 누군가를 탓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창 밖의 어떤 무리들과 달리 이들은 다음 생을 소망하며 종교적으로 '이방인'인 화자의 미래까지도 기도한다. 하지만 화자는 본인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다.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으니 '다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화자는 '믿지 않는' 창조주에게 말한다. 나는 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며 살아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거기에 존재한다면 나를 이제 거두어 가길 바란다. 그리고 물어주길 바란다. 다음에는 태어나겠냐고.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많은 가사다. 죽음 뒤에 일어날 상황들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보통 개신교를 기반으로 한 종교인들에게 '사후세계'란 존재한다. '환생'의 개념은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죽음이든 죽음의 이후든 종교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바로 사랑이다. 어느 종교든 사랑은 신성하다.

 


여기저기서 도난 알람이 울고,
누구도 달래줄 수가 없지
빼앗긴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도망자들의 안도와 섞이지
덩치를 가진 이들은
약한 자의 소란 앞에 웃음이 터지지
너는 나를 끝내 못 이기고
내가 가자는 대로 몸을 맡기지



신앙이 지켜주는 이들과 달리 창 밖의 여기저기에는 '도난 알람'이 울린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달래줄 수가 없다.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는 본인의 안위를 지키기 급급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빼앗긴 사람들의 '울음소리'는 누군가 대신 빼앗겼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은 도망자들의 '안도'와 섞인다. 덩치가 있는 '강한 자'들은 이러한 '약한 자'들의 소란 앞에 웃음을 터뜨린다. 소멸한 사랑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화자와 '너'는 그토록 '봐'왔던 사람들에게 어떤 이질감을 느낀다. '너'는 끝내 화자를 이기지 못하고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 멸망을 제일 처음으로 마중 나가는 것이다.



거봐, 저길 엿보기만 할 수 있는 이곳이 지상낙원이야
아둥바둥, 삶에 연연 하는 사람들은 못 보는 곳이야.
서로 미워하는 맘은 녹아, 본래의 모습이 사랑인 양
그제서야 알게 된 엄마 아빠도 서로 끌어 안잖아



화자는 말한다. 거봐, 저길 엿보기만 할 수 있는 이 곳이 바로 지상낙원이야. 이 곳은 아등바등 삶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절대 보지 못하는 곳이야. 이 곳에서는 서로 미워하는 마음이 녹아내리고, 본래의 모습이 사랑인 양 깨닫게 될 거야. 봐봐. 그제야 엄마와 아빠도 서로를 끌어안고 있잖아.


상당히 은유적인 가사다. 우선 화자가 지정한 '이 곳'은 창 밖의 사람들과 대비되는 어떤 공간이다. 피난처이자 쉴 터는 아니다. 지구 멸망의 시간에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곳은 그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는 곳이다. 그러니 '저길 엿보기만 할 수 있는 이 곳은' 카니발리즘의 바깥과 달리 지상낙원인 것이다. 저 바깥의 사람들은 삶에 연연하는 현대인들이다. 지구 멸망 앞에 현대인들은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닌 적개심을 표출한다. 그와 대비되는 이 곳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 본모습을 진정으로 알게 돼서야 사람들은 사랑을 느끼고 서로를 껴안는다. 하지만 늦었다. 지구 멸망은 한 시간 내로 다가왔다.




카운트 다운


[BRIDGE]


Seoul city falling down

Tokyo falling down

Honolullu falling down

Vegas falling down

Ottawa falling down

Argentina falling down

Everything slowly falling down

Good for you to be faded with


저길 봐

공든 탑이 무너지네

참 아름다워 우릴

감은 태엽이 늘어남에

저기 저 시간과 금으로

이루어진 높은 것들도 못 피하는 free fall

눈 내리깔며 흘겨보던 지평선과

같은 높이가 되는 기분 어떨까


오 나는 오직 사랑만을 두고 떠나지

오 나는 차마 눈을 감지는 못함이

나의 유일한 괴로움

오 나는 다시 생을 논하고 싶어져

난 너 없이는 모두 자신이 없어

Count down started



이 부분부터는 음원 버전에는 삽입되지 않은 네이버 온스테이지 밴드 버전만의 가사다. 원곡에는 마지막 훅 뒤에 카운트 다운을 세는 사람들과 축하의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지구 멸망을 기원하는 것처럼.


재난의 범위가 더욱 확장된다. A 파트의 '우리'에서 B 파트의 '사람들'을 넘어 브릿지의 '도시'로 말이다. 서울이 무너진다. 도쿄도 호놀룰루도 베가스도 오타와도 아르헨티나도 무너진다. 모든 것들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당신' 또한 희미해져 간다. 급작스러운 재난을 슬로 모션으로 천천히 묘사하는 가사 때문에 이 지구 멸망을 좀 더 곱씹게 된다.


화자는 다시 한번 '봐'라고 한다. 우릴 감은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시간과 금으로 이루어진 저 높은 공든 탑이 무너지며 자유 낙하하는 것을 천천히 지켜보니 참으로 아름답다. A 파트에서 화자는 무너지는 것들이 '아름답지 않다'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확실하게 체념을 한 것이다. 저 높은 것들이 내리깔며 흘겨보던 지평선과 같은 높이가 되는 기분이 어떨까. 화자는 관조적이다. 마치 이 재난과 자신은 이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화자는 지구 멸망 뒤에 오직 사랑만을 남겨두고 떠난다. 이 사랑을 오롯이 놓아주지 못하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괴로움이다. 사랑은 다분히 파괴적이지만 숭고하기 때문이다. 이 괴로움 때문에 화자는 다시금 삶을 논하고 싶다.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든 사랑의 파괴력을 목도하고 나자 오히려 재생을 희망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늦었다. 카운트 다운은 이미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 가사를 내뱉는 화자는 '신'이 아닐까. 인류에 사랑을 내려주었지만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해 되려 '사랑'이란 가중처벌을 내리는 신. 사랑하기에 파괴하고 사랑하기에 재생을 허락하는 신. 


'지구 멸망'의 일반적인 분위기와 다르게 마치 이를 반기는 듯한 아웃트로의 사운드는 아이러니하다. 신이 난 사람들의 카운트 다운과 축하의 박수는 '새해'를 연상시킨다. 매 순간이 지구 멸망과도 같은 사람에게 어쩌면 사랑은 피할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새해와 같은 반복적인 '피난처'이자 '쉴 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체념하듯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재해처럼 때때로 사랑은 우리를 불가항력의 상황으로 내몰곤 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을 신성시하는 것처럼. 곡 속의 화자는 '나'이자 '너'이며 '우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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