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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우 Oct 05. 2020

중산층

우리는 무얼 가졌나요

다들 자기는 '중산층'이래. 압도적으로 부유하거나 궁핍하지 않기에 혹은 어딜 가든 중간만 가면 장땡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일까. 5지선다 문제에서도 연필을 굴리다 끝내 3번을 찍는 우리는 많고 적음을 따지기 힘든 사랑에서도 중산층을 희망하고 있어.


나는 넘치지 않게, 부족하지 않게 자라왔어. 그래서 때때로 넘쳐흐르는 사람들을 부러워했고 바닥을 보이는 사람들을 동정했지. 그러니 동시에 누군가는 나를 동정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부러워했겠지. 이쯤이면 중간은 될 거라는 내 지갑의 상황과 감정의 상황, 더 가지고 싶다가도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에 잠시 달리던 발을 늦추던 나. 그런 나를 너는 동정했을까 부러워했을까.


그렇게 우리의 사랑도 평생 중산층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여기서 '우리'는 너와 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부를 드러내면 언젠가 물어 뜯기고 빈곤을 표출하면 반드시 얕보이는 세상살이 때문에 사랑도 중간을 따르는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얼마나 힘든 일이야. 더 나은 계급을 희망하면서도 그걸 말할 수 없다는 건.




중산층은 참 편리한 표현이야. 0부터 100 사이의 숫자에서 35부터 65를 포괄할 수 있는 단어니까. 조금 부족하더라도 반올림하면, 조금 많더라도 반내림하면 우리 모두 중산층이라는 이름으로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 아마 많고 적음이 서로를 가르는 벽이 되지 못하게 만들려는 우리의 편의에서 시작된 슬픈 단어겠지. 언젠가 가지고 싶었던 하늘색 MP3를 위해 말없는 투쟁을 벌였던 내 모습이 떠오르네. 이제 나는 멜론, 스포티파이, 사운드 클라우드를 통해 손쉽게 음악을 찾아 듣는데. 그땐 그거 하나 없으면 내 등굣길이 너무나 가난했어.


적당선의 가격일 때에만 때때로 가질 수 있었던 중산층 가정의 나처럼, 떼를 쓰며 매달린다고 달라지지 않는 그때의 너처럼 애정도 결국은 제 분수에 맞는 값을 치러야 하는구나. 여기에도 1+1이 있다면 가성비를 따져가며 구매를 고민했을 텐데. 감정은 별책부록, 덤, 사은품이 돼야만 안도하며 구입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 즈음 나를 뱄던 우리 엄마의 젊은 모습과 비슷하겠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27평의 우리 집은 45평이 되었고 그 성장에 따라 내 키도 크기 시작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의 공간은 여전히 비슷한 크기를 유지했어. 중산층이라는 어중간한 수식어 때문일까. 10여 년 전 부엌 찬장에서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에 흐릿하게 쓰여있던 '우리 애들에게 고작 식빵 밖에 먹일 수 없어 슬프다'는 내 목덜미를 꽉 붙잡았고 돈 때문에 구차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아빠의 충고에는 인지부조화를 느꼈어. 다행인 건 그런 부분에서 나는 비교적 일찍 철이 들었다는 거지. 마트 바닥을 뒹굴며 과자를 사달라고 떼써본 적이 없으니까. 누나의 휴대전화와 동생의 용돈 인상에도 나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어. 우리는 중산층이니까.




그렇게 풍요로운 너를 만났어.


첫 편지와 선물 꾸러미를 준비했을 때,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텍스트와 선물의 부피 때문에 나는 초조했어. 고작 몇 줄의 글과 5만 원 언저리의 가격표를 단 선물이 내 마음의 크기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건 아닌데 말이야. 편지와 선물을 뜯어보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는 너에게 머쓱한 몸짓과 함께 건넨 다음엔 더 좋은 걸 해주겠다는 말은 나를 참 비참하게 만들었어. 결국엔 둘 다 틀렸지. 다음은 없었고 더 좋은 걸 해주지도 못했으니까.


눈에 띄지 않는, 그렇다고 빈곤하지도 않은 딱 심심한 맛의 사랑이면 충분하잖아. 다들 그렇게 살잖아. 근데 왜 우리의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커다래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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