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임박하며 그간 쌓여왔던 나의 취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이를 테면 베이지색을 좋아하는 것과 벽돌색 립스틱을 즐겨 바르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까지의 소비를 돌이켜 보니, 내 옷장에는 죄다 베이지색. 아직도 내 꿈은 아무튼 시리즈의 <아무튼, 베이지>를 출판하는 저자일 정도로, 나의 베이지 사랑은 대단하다. 그러니 옷을 고를 때나 물건을 살 때 베이지색이 있으면 일단 베이지를 선택하고 본다. 그래서 이제는 의도적으로 베이지와 어울리는 흰색, 검은색 옷을 사기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취향은 향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무화과 향수로 유명한, (내 남자 친구는 이 향을 군대에서 예초기 돌리면 나는 냄새로 기억한다. 비싸게 사지 말라고.) 향수에 입문한 뒤로 나는 풀 냄새, 땅 냄새라는 향수는 죄다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역시 구관이 명관인지, 딥티크 필로시코스 100ml를 다 쓰고 나서 다른 향수를 뿌려봐도 이만큼 만족할 수 없었다. 다시 향수 유목민이 된 것이다. 나름 비슷한 취향으로 조말론의 우드세이지앤 씨솔트(근데 이건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무난하고 좋은 향기다.), 조금 마이너한 계열로는 이솝의 휠이 그나마 내 취향의 향수였다.
이솝의 휠은 교토의 산사를 모티브로 조향 된 향수. 진한 풀냄새와 땅 냄새, 나무 냄새가 매력적이다. 그래서 조금 남성적이고 마이너한 향수로 꼽히는 것 같다. 휠은 요즘 제일 마음에 들어 뿌리지만, 역시 필로시코스를 이길 수는 없다. 100ml라는 큰 용량을 다 쓰고 새로운 향수를 입문하려는 시도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 앞에 한없이 위태롭다. 다시 필로시코스 앞으로 일 보 전진.
좋아하던 향수를 다시 사려니 비행기를 즐겨 타던 바야흐로 1년 전이 생각났다.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면세 찬스로 향수를 사곤 했다. 면세에서 사면 훨씬 싸기도 하고,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향기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일단 면세에서 향수를 산 다음에 여행지 숙소에서 언박싱을 하고, 여행지에서 몇 날 며칠 그 향수를 뿌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 향수를 뿌리면 여행지에서의 기억이 물씬 풍긴다. 이렇게 향수 쇼핑을 하던 때가 언제였더라.
지금은 기약할 수 없는 면세점 향수 쇼핑 덕에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향수를 찾아본다. 50ml를 살지, 100ml를 살지 고민하던 내게 희망적인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50ml의 향수를 사고, 그 향수를 다 쓸 때쯤에는 다시 비행기를 탈 수 있지 않을까, 면세 쇼핑에서 새로운 향수를 사고, 여행지에서 뿌리며 그 향기를 소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으며 용량 옵션에서 50ml를 선택했다. 희망이 어린 고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대의 초입도 하나만 뽀개는 기질의 나답게 무화과 향수를 뿌리며 맞이할 것이다. 남자 친구는 군대 시절 예초기 돌리던 때를 떠올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