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좋아하는 몇 가지 과일이 있다. 딸기, 귤, 청포도. 청포도는 수입산이 많아 거의 매 계절 먹을 수 있어서인지 올해는 유독 청포도를 많이 먹었다. 마트에 들리면 청포도를 꼭 샀고, 저녁에는 밥 대신에 청포도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렇게 여름에는 청포도 나무 하나를 박살 낼 각오를 한 것처럼 청포도를 줄기차게 먹는다면, 겨울에는 귤을 먹는다.
달달하고 상큼하고 건강에도 좋은 귤은 회사에서 약간 출출하거나 졸음이 몰려올 때 최고의 간식이 된다. 달콤한 과자 같은 게 땡길 때 귤을 먹으면 어느 정도 심리적 만족감이 생기고, 졸음이 몰려올 때 먹으면 마치 비타민 수액주사를 맞은듯한 플라시보가 생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매일 귤을 싸오고, 또 나누고 까먹는다.
그렇게 하루에 3~4개의 귤을 운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회사 책상에는 귤이 항상 있는데, 문제는 선입선출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가져온 지 오래된 귤부터 먹어야 하는데(사실 이 귤은 다 한 박스에서 동거 동락한 동기지만.) 기준 없이 까먹고 있다. 귤은 어쨌든 먹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선입선출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날도 여느 오후처럼 졸리고 배고프다는 이유로 귤을 집어 들었다. 귤을 집어 든 순간 알 수 있었다. 귤껍질이 귤에 착 달라붙어있었다는 걸. 귤을 빨리 먹어치워야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서둘러 서둘러 귤을 까려고 손톱을 껍질에 드밀었다. 이미 과육에 착 달라붙은 귤껍질은 과육에서 분리될 생각이 없었다. 귤이 마른 것이다.
조심스럽게 귤껍질을 조금씩 까다, 성질이 나면 한 번에 많은 껍질을 까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귤의 과육이 줄줄 흘렀다. 귤 하나를 먹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정성이 들다니, 오렌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입선출'이라는 위대한 논리는 내가 가져온 귤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러다 불현듯 내가 그동안 동료들에게 나누어줬던 귤이 생각났다. 내가 귤이 아니라, 오렌지를 준 건 아닐까. 내가 그 오렌지 컨디션의 귤을 받았다면, 분명 일침을 날렸을 것이다. 오렌지가 되어버린 귤을 까면서 어쩌면 달콤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애쓰고 노력하는 과정이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과 모든 것은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의 귤똥철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