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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한량 Jun 28. 2022

안부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는 제가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요. 다음에 시간 보고 봬요!"

-“네 그렇게 해요!”


끝이었다. 가장 자연스러운 마무리. 최소한에 격식은 차렸고 결단의 칼질은 행하여졌지만, 결론적으로 칼자루는 내가 쥐지 않은 가장 완벽한 무책임. 골똘히 고민하다 친구와 만들어낸 이 완벽한 대사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며 쓴웃음을 지어냈다. 생에 처음 받는 소개. 일면식 하나 없는 타인을, 지인을 통해 알게 되고 호감을 적립해가며 연인으로 발전해야 하는 이 험난한 과정을 나는 역시나 버텨내지 못하고 낙오했다. 문득 연인이 되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버리는 한 영화가 생각났는데, 어떤 동물로 변할 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그 답은 아직도 여전했다.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은 주선자의 입장이 난처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뿐이었다. 내가 너무 실망적이어서 나뿐만 아니라 주선자까지 부끄럽게 만드는 일만 없었으면 했다. 애당초 난 첫눈에 이성의 마음을 휘어잡는 기술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건 나에게 상처가 되질 않지만,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너무 큰 상처이기 때문이다. 잡생각이 많아지니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분명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뭘 했는지 뭘 하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책을 펴고 읽었지만 글씨들은 춤을 추고 내 머릿속에 박히지 않았다. 단어들과 문장들은 내 머릿속을 떠돌며 문란하게 사라졌다. 정확히 34페이지. 소개팅을 받은 후로 일주일째, 난 그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형용할 수 없는 답답함을 풀기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평소엔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그냥 걸으라고 속삭였다. 하필이면 오월의 밤은 걷기 좋았으며 적당히 바람이 불어 상쾌하기도 했다. 9시 36분,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거리엔 나의 걸음걸이만 들릴 뿐이었다. 어두컴컴한 우리 동네의 낯선 모습에 익숙해져 갈 때쯤 왜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지 골똘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의 감정은 그 근원지를 모르고 실재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의 불순물이라 감히 해결할 방법을 알 수없으니 차선책으로 해결할 것은 다른 무언가에 열중하는 일이었다. 집어 든 책이 재미없지는 않았다. 아직 도입부에 불과하지만 꽤나 흥미로운 책이었으며 문장들 또한 마음에 들었다. 그 책에 죄는 없다. 문제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게 언제였지?'


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책을 읽긴 했지만 그 순간들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만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 여름밤의 꿈을 꾸고 난 다음 날같이 잠시 멍해진 나는 지난 기억들을 헤집다 아스라이 한 장면을 찾아냈다. 3년 전의 책을 읽는 나. 그것도 아주 집중한 채 빠르게 굴러다니는 눈동자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꽤나 재미있게 몰입해서 읽는듯했다. 무슨 책이었더라.. 애써보았지만 책 제목보다 먼저 기억난 것은 유민이었다. 맞다. 제목이 뭐였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 그 책들의 주인. 유민은 나의 건너편에서 고민에 빠진 듯 인상을 쓴 채 노트북에 열중하고 있었다.


3년 전, 서른의 가을. 난 쫓기고 있었다. 꿈의 비자가 만료해가고 있었고, 나의 세계가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세계 종말의 앞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 조연처럼 정신이 나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마냥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감히 종말의 앞에서 저항할 생각이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려는 악착같은 의지를 가질 정도의 그릇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난 그저 겁에 질려 도망가기 바빴다. 모든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불안에 빠져서 끝없이 무언가를 해내고 있었어야 했다. 극 중 가장 한심하다 느껴지는 부류. 주인공들도 녀석과는 어울려서 좋을 것이 없다고 꺼려하는 캐릭터. 무너지는 세상에 어울리는 가장 무너진 사람. 무너지는 나의 세계에서도 나는 주연은 아니었나 보다.


그 무렵 일하던 카페의 동생이던 유민이가 자주 카페에 나오기 시작했다. 취업준비가 한창이던 그녀는 디자인과 관련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따금씩 어떤 게 괜찮냐는 물음을 던져주었다. 나의 선택들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난 나름 고심 끝에 정성스럽게 답해주었다. 평일 저녁의 그저 그런 카페에는 그 정도의 한가함은 넘쳐흘렀다. 정답이 없는 싸움에 유민은 심심하다며 이따금씩 바(bar)에 들어와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런 유민의 앞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도 난 수많은 문제들에게서 도망치고 있었고 갈 곳이 없어 우연히 일찍 출근을 했을 뿐이었다.


내가  했던 그저 그런 카페는 그저 그런 카페치곤   매장이었다. 같이 일하는 동생들과 인사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잔 부탁했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냐며 묻던 사람들 사이로 인상 쓰던 유민이 보였다. 제일 구석이지만 바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이 유민의 지정석이었는데 머그잔이 뜨거워 그냥 잔을 바로  자리에 놓아버린 채 자리에 앉아버렸다. 짧게 유민과 인사를 나누고  귀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유민은 골똘히 고민 중이었고 나는 이름 모를 노래들을 듣고 있었다. 가끔 커피를 마실  안경들 사이로 하얗게 김이 서렸고 그저 그런 커피맛은 여전했다. 처음 10여분은 있을만했으나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담배가 피고 싶어서 담배를 피우고 왔다. 유민은 담배냄새가 심하다며  주위로 향수를 뿌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말했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긁적이다, 유민의 가방 속에 있던  책을 발견했다. '달과 6펜스' 혹시  책을 봐도 되냐며 물었고 유민은 흔쾌히 건네주었다.


처음에는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은 30여분 남짓했으니 간단히 살펴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도 예전엔 책을 즐겨봤었으니까, 책은 생각보다 쉽게 술술 읽혔다.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편안하게 그리고 집중해서 읽었다. 어느덧 시간은 출근시간을 가리켰다. 간단히 출근 전에 담배 하나를 더 필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순간, 유민과 눈이 마주쳤다. 내 다음 행동을 알기라도 하듯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도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흡연장소로 향했다. 빠르게 담배를 피우던 나는 유민이 향수 뿌렸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래서 담배를 다 피곤 화장실로 가 괜스레 입을 한번 헹구었다.


난 다음날도 책을 마저 읽기 위해 도망쳤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의 다음날에도 난 유민의 앞에 앉아있었다. 갑작스럽게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책을 읽었던 건, 왠지 모를 편안함이었다. 특별히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특별한 인사를 하지 않아도 간단한 눈 맞춤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모든 것이 날 목 조르고 몰아세우는 듯했지만 유민만은 그러지 않았다. 내게서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자신이 디자인한 것들을 보여주며 어떤 게 더 좋냐는 질문은 여전했지만 그때마다 난 진심을 다해서 답했다. 그래서 나도 나름의 값어치를 하는 것 같았다. 당신의 앞에 있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마치 오래전부터 봐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대해주는 느낌. 그 편안함이 내겐 안정감을 주었다.


이따금씩 열심히 읽다 보면 따분해하던 유민은 재미있냐며 물어왔다. 난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눈빛으로 그녀에게 답하며 잠시 기다리라 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 끊기고 싶지 않으니 나의 몰입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 했고 어느 정도의 전개가 흐른 뒤에야 비로소 대화를 이어나갔다. 유민은 추천해줄 책이 있다며 가방에서 다른 책들 몇 권을 꺼냈다. 다른 책들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 한 권 '미 비포 유'라는 책에 눈에 갔다. 어디선가 영화 예고를 본 것 같았다. 평소 멜로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의 구미를 당기지 않은 영화였는데, 딱히 끌리는 책이 없기에 그 책을 지목했다. 유민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고 지금 읽는 거 다 읽으면 빌려주겠다 했다. 난 어떻게 이걸 고를지 알았냐는 눈빛으로 유민을 쏘아봤지만 그녀는 특유의 개구쟁이 표정을 지으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났다.


행복한 기억을 열어본 것 마냥 내 마음은 편안해졌고, 이윽고 유민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꽤나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3년여 만의 연락. 유민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일하던 그저 그런 카페를 관두고 나올 때 즈음이었다. 그 후로 연락해보지는 않았다.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 솔직히 가끔 생각나던 것은 유민보다 그 향수의 향기였다. 난 꽤나 그 향기를 좋아했는데, 차마 네가 쓰던 향수가 뭔지 물어보지를 못했다. 언젠가 모델명을 들은 것 같긴 하지만 그냥 흘려들은 듯하다. 그 당시 난 막연하게 언제나 그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도저히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해서 한 친구에게 전화했다. 간략하게 현재 나의 상황을 얘기하고 유민에게 전화를 해봐도 되겠냐는 질문이었다. 친구는 뭐가 되었든 밤 10시가 다 되어서 실례일 테니, 내일 낮에 한번 연락해보라 했다. 난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잠들 수 없다 했지만 친구는 이럴 때일수록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했다. 날 잘 아는 그 친구는 덧붙여 이렇게 말해도 너는 전화할 테지만 분명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내 주위에는 어떻게 날 이렇게 잘 아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지만 난 나와 그녀의 사이가 그토록 냉담하지 않을 거라 말했고 기어이 끊고 전화를 걸었다.


앞에는 불빛 한점 없는 논밭이 펼쳐졌다. 저 멀리 이름 모를 공장의 실루엣이 보이기는 했지만 난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신호 대기음을 듣고 있었다. 통화는 이어졌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쓴웃음이 나왔다. 친구의 예상이 너무 정확해서 기분이 조금 나빠 나온 웃음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것에 놀랍지는 않았다. 다른 것을 하고 있었을 테지... 라 생각하며 약간 늦은 시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터벅터벅 걸으며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사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무슨 말을 해야 그간의 공백을 충분히 채워낼 수 있을지 또한 시답지 않은 나의 용건을 풀어낼 자신이 없긴 했다. 난 그저 오랜만에 당신의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싶었으니까, 그냥 그 이름 모를 향수의 향을 맡으면서.


다음날의 휴대폰은 조용했다. 당연히 끝이라 여겼던 소개팅녀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의 지난 카톡을 읽었지만 그 어떠한 말도 없었다. 일하는 틈틈이 느껴지는 진동에 나도 모르게 계속 폰을 들여다보았다. 재난문자나 쓸데없는 카톡 알림들이 줄을 이었다. 결국 그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내가 기다린 유민의 연락은 오질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잠들기 전에 유민의 카톡을 몇 번 열어보았다. 뭐라 적어야 할까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그냥 접고 눈을 감았다. 친구에게 말하면 잘했다고 칭찬해주겠지. 다음에 만나면 이 얘기를 해서 칭찬받아겠다 생각했다. 그 뒤로 마법처럼 다시 책이 읽히기 시작했다. 67페이지. 드디어 안 읽히던 다음 문단들을 돌파했다. 역시나 그 책에 문제는 없었고 나만의 문제였다. 난 책장을 넘겨갔다. 술술 읽히는 동안에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울릴 일이 없는데?' 슬쩍 보고는 난 옅은 웃음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다. 꽤나 감정선이 연결되는 부분이라 다 읽고 콜백을 할지 지금 바로 받을지. 당연히 바로 받기로 했다. 책을 덮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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