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무엇인가. 많은 여행 서사 연구자들이 여행의 본질을 자아(Self)와 타자(Other)의 만남이라고 보았다. 쉬운 말로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만남이다. 낯선 것은 새로운 자극을 주고 흥미를 유발하지만 동시에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좋은 여행이란, 그 흥미와 위험 사이의 외나무줄에서 위험은 최소화 하고 흥미는 극대화시킨 여행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위험과 흥미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 제각각이다. 사막여행이나 아마존 투어 같은 '이국적인' 여행을 누군가는 아주 흥미롭게 느낄 수 있고, 누군가는 아주 위험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가들의 몇가지 카테고리를 내 맘대로 정리해보자면 먼저 오이디푸스형 여행자들이 있다. 아버지(이미 경험한 사람들)의 여행기를 통해 지혜를 얻고자 하지만, 나중엔 아버지를 부정하고(뭐야 와보니까 별거 없네. 한국인만 득실거리잖아?) 살해한다. 걸리버형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동족을 만나면 못견디는, 그래서 좋은 여행의 기준이 '한국인이 덜 가는 곳'이나 '관광객 적은 곳'인 이들이다. 그들은 종종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이고 관광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심각한 아이러니에 빠져있다. 마지막으로 햄릿형인데, 설명할 것도 없이 우유부단형이다. 그들은 죽은 아버지의 망령 (먼저 여행한 이들의 인스타그램, 블로그, 여행잡지 등)에 늘 휩쓸린다. 심지어 여행지에 도착해서도 그들은 밤마다 아버지 유령을 만나고 괴로움에 잠꼬대를 한다. "내일 벨렝탑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점심 먹고 가느냐, 먹기 전에 가느냐 그것도 문제로다."
고백하자면 나는 햄릿형이다. 여행에 별로 관심도 없고 많은 정보도 없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즉흥적으로 가고 싶은 데로 가서 볕 잘드는 카페에 앉아 일기나 쓰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가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아는 것도 많아지고 나니까, 여행지에서 뭘 선택해야할지 너무 고민이 됐다. 생계를 위해서 프리이빗 투어 가이드로 몇 년 일하면서 남의 돈으로 묶어본 좋은 호텔들, 좋은 식당들. 좋은 곳은 세상에 어쩜 그리 많은지. 시간과 돈은 제한적인데 세상에 가볼 만한 곳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여행자의 주 욕망이 영토화(mapping)인데, 단지 지리적인 영토의 지도화 뿐만 아니라, 지식의 지도화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나는 구글지도에 별표 표시한 곳을 더 늘리는 식의 영토의 지도화 뿐 아니라, 안 가본 세상의 지식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도 커진 것이다.
그러나 리스본에서 거주하는 동안 내 여행 스타일은 오히려 예수님 스타일이었다. 포르투갈이 한국인들사이에 최근 몇년간 여행지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리스본을 찾는 친구와 가족들이 꽤 많았다. 많을 땐 한달에 대여섯팀씩. 언어, 지리, 문화를 잘 아는 내가, 가족이나 친구들이 올 때 마다 모든 십자가를 지어야만 했다. 결정을 한다는 것은 권리가 크다는 의미보다는 책임을 진다는 것. 맛있는 식당을 추천하고 밥을 먹는 내내 동행의 안색을 살피며 입맛에 맞나, 초조해하는 기분. 3년 동안 가이드로 일을 할 때나, 친구들에게 식당이나 유적지를 소개할 때마다 내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였다. 물론 그들이 좋아해줄 때 느낀 기쁨이 더 크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 유적지가 가득한 리스본 근교의 신트라. 엄마와 여동생이 2년 만에 처음 유학 온 딸과 언니를 만나러 포르투갈에 왔을 때, 신트라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자의 별정, 헤갈레이라를 추천했다. 그런데 하필 겨울이라, 봄여름 내내 화려하게 피어있던 화려한 각종 꽃들이 다 지고 우울한 빛만 띠었다. 프리메이슨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사후세계를 구현한 지하 동굴이 그렇게 음산할 줄은 몰랐다. 헤갈레이라 별장을 다보고 신트라 궁엘 갔는데, 그때 어머니가 “역시 아무래도 왕이 살던 데가 부자귀족이 살던 데 보다 쪼매 낫네” 하시며 그나마 아쉬움을 푸셨다는 후문.
외삼촌 가족들이 놀러 왔을 때는 초등학생 사촌 동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심어주고 싶어서 나름 역사적으로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숙소를 추천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오래된 숙소에, 복도를 가득 메운 초상화들이 너무나 음침했다. 동생들은 겁에 질려서 귀신 나올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괜히 그런 숙소를 추천한 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신트라는 바다와 산을 다 갖고 있어, 귀족이나 왕족들이 여름 별장을 짓고 더위를 피하던 피서지였다.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그런 만큼 겨울엔 춥고, 비가 오면 금방 분위기가 음산해진다. 리스본 시내가 아무리 맑아도 차로 40분 거리 신트라에 오면 흐리기 일쑤다. 햄릿형이든, 오이디푸스형이든 여행자가 날씨를 정할 수는 없다. 언제든 예측불가 리스크가 있기 마련이라는 걸 전제로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 일본여행을 준비하던 아는 언니가 여행 책자에 적혀 있었다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책에서는 3인 이상 여행할 경우 싸우지 않는 법에 대해 팁을 전해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나 덜 본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였다. 그 말을 들을 때의 깨달음이란. 그것은 불교의 돈오와도 같았다. 어떠한 상황에도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기. 그래 결심했어, 앞으로 내 여행의 방식은 지눌스님 스타일로 하겠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