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을 와서 첫 일 년 동안 내가 맞은 모든 관계들은 새로 시작하는 관계였다. 한국에서는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꽤 좋아했다. 꽤가 아니라 사실 아주 많이. 즐겁게 살거나 자기 소신이 멋있는 분들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랑 책모임을 하거나, 친구의 소개로 스터디를 하는 식으로 일주일 저녁 스케줄이 꽉 찼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한테도 넉살 좋게 넙죽 말을 잘 걸어서 같이 다니는 동생들이 부끄러워하긴 하기도 했지만, 낯선 사람과 친분 쌓기는 내게 어려운 퀘스트보다는 하나의 재밌는 소일거리 정도로 느껴졌다.
그러나 외국으로 유학을 와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내가 새로운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건, 그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좋은 사람이 아니거나 다가가서 상처만 받고 끝나도, 최악의 경우에 나를 이용만 하고 배신한다고 해도,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이미 좋은 친구들이 두텁게 나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주는 친구들이 만리 밖에 있는 이곳에서 나는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거의 없어지고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처음부터 쌓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선입견이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여자+대학원+유학'이라는 조합은 편견을 사기에 매우 좋은 조합이었다. '걸레'라는 최악의 편견부터(실제로 들은 말) '부모님 돈으로 인생 편하게 사는 애'라는 전제를 깔고 대화를 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전공도 특이해서 어쩌다가 이걸 공부하게 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글쎄 나도 근사하게 한두 문장으로 내 삶을 정리하진 못하겠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질문인데 어쩐지 공격처럼 느껴지는)은 박사하고 나면 뭐할 거냐는 질문. 이럴 때는 나도 그냥 직장인이면 좋겠다. 대리에게 대리 끝나면 뭐할 거냐고 묻지는 않을 것 같은데. 왜 내가 내 인생에 자꾸 해명을 해야 하지? 그런 설명 없이도 예전부터 오랫동안 나를 알고, 때로는 모순적인 나의 선택들도 이해해주는 한국의 친구들이 너무나 그리웠다. 사람을 만나는 게 싫어지고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혼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