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떼어내는 법
나는 2022년 5월 4일을 기점으로 다시 태어났다. 절대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슬픔과 절망에 내 몸과 마음을 맡기고 시련에 무릎을 꿇었다. 과거의 나는 매 순간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던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매일이 신났고, 재밌고 멋진 것을 마주하기 위해 바빴던 내가 이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길을 잃어버렸다. 다시 꿈을 꾸고 희망을 그려야 하는데 힘이 없다. 아 내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하고 싶은 던 것. 그것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나는 어릴 적 그림 그리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어린 마음에 화가를 꿈꾼 적도 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고등학교 미술 시간 이후로 약 20년을 그림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지 않았던가. 18살 이후로 38살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내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니 나 조차도 참 낯설고 이상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충동이 어찌나 강렬한지. 삶의 유일한 숨구멍인 것 마냥 스케치북과 연필을 사다 그림을 그렸다. 거의 20년 만의 그림이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은 너무나 적나라하고 사실적이었다. 내 안에 하고 싶은 말, 슬픔, 분노, 그때 내가 느꼈던 것, 보았던 것을 스케치북에 그대로 옮겼다. 남편에게는 차마 보여 줄 수가 없는 그림이었다.
제일 먼저 까궁이의 초음파 사진을 그렸다. 까만 화면 사이로 나타나는 아이의 형태. 처음 마주 했던 난황. 8주의 너를, 10주의 너를, 14주 너의 손가락을,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아기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다가 나도 모르게 울음이 올라와 펑펑 울었고 그러면 나는 거울을 보고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다시 그림으로 그렸다. 나중에는 번개 맞은 몸과 팔다리가 잘린 내 모습도 그렸다. 내가 마주한 슬픔을, 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가 없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왜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지. 이제 와서 생각하면 무의식 속의 내가 나를 살리려고 그림을 그린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때 내가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매일 스케치북의 그림으로 떨어져 나온 내 슬픔을 마주했다. 너무나 적나라해 소름이 끼치는 그림을 그리며 스케치북에 내 슬픔을 옮겼다. 어쩌면 그리는 행위를 통해 내 마음속 슬픔을 조금씩 떼어낸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슬픔을 덜어냈다. 그리고 며칠 뒤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 적나라한 슬픔이 아닌 내가 가진 작은 꿈과 희망을 스케치북에 그린 거다. 슬픈 장면이 계속 머리에 떠올라 그리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던 내가 희망을 그리다니. 나는 그렇게 그림 덕분에 슬픔 속 깊이 묻혀 있던 나의 희망을 건져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희망의 그림을 넘어 의미 없는 일상을 그리게 되었다. 절망을 그리던 내가 의미 없는 일상을 그린 건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다. 적나라한 슬픔에서 희망을 그리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그리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요즘 나는 신나고 즐겁게, 가끔은 키득키득 웃으며 ‘일상 너머의 상상’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