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의 대성통곡
5월 6일
아마 오늘 퇴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간호사 선생님께서 귀띔을 해주셨다. 실은 남편과 나는 퇴원보다 조금 뒤 있을 의사 선생님의 회진을 더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궁금한 것이, 의문인 것이 너무 많았다. 남편과 나는 질문을 하나씩 메모장에 정리했다.
친절하지만 냉철하고 똑똑한 젊은 의사 선생님은 우리의 길고 긴 폭풍 질문을 정말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답해주셨다.
1. 양막파수가 왜 일어났는가?
답 : 양막 파수의 원인을 이것 때문이다라고 답할 수 없지만 자궁벽과 양막은 생각보다 튼튼한 조직이기 때문에 외부의 충격이나 활동으로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균에 의한 양막 파수로 의심된다. 내 몸에 열이 났던 것도 균 감염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2. 왜 갑자기 양막 파수가 됐는가?
답 : 균으로 인한 파수로 의심된다. 맥수술로 인하여 균이 침투했을 수도 있고 대변에 의한 균일 수도 있고 질염일 수도 있다. 어떤 경로로 감염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맥수술로 인한 균의 감염을 조심스레 의심해 볼 뿐이다.
3. 양막 파수가 되면 다 사산을 하는가?
답 : 다 사산을 하는 건 아니다. 미세하게 양수가 새면서 자연적으로 막히기도 한다. 또한 완전 파수가 되어도 주수가 22주, 23주 이상이면 아이를 살릴 수도 있다.
4. 양막 파수가 되면 방법이 없는가?
답 : 양막 주입술이 있지만 1년에 진행된 케이스가 15건도 되지 않고 그중 성공 케이스도 2-3건 밖에 되지 않는다.
5. 더 빨리 병원을 왔으면 아이를 살 릴 수 있었는가?
답 : 주수가 너무 일러 장담할 수 없다. 몸에 열이 나지 않았다면(균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항생제를 맞으며 주수를 올려 분만을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출산 후 태아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
6. 혹시 많이 움직여서 양막 파수가 된 것인가?
답 : 양막은 생각보다 튼튼한 조직이다. 세균으로 인한 파수로 의심된다. 많이 움직여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7. 여기 대학병원도 시험관 하는가, 교수님이 계신가?
답 : 대학병원에서도 난임을 진행한다. 하지만 난임 전문병원이 훨씬 더 많은 경험과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병원은 환자의 선택이다.
8. 임신 시도는 언제 다시 해도 되는가?
답 : 보통 20주 이상의 조산일 경우는 1년 뒤에 임신을 하는 것이 좋지만 나와 남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최소 6개월 뒤에 할 것을 권한다. (하아 6개월이라니... 눈을 감았다 떴을 때 6개월 뒤였으면 좋겠다.)
9. 맥수술이 감염 원인 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자궁경부가 짧은 나는 앞으로 임신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맥수술을 해야 하는가? 임신하면 병원에 내도록 입원해야 하는가, 집에서 누워만 있어야 하는가?
답 : 이제 조산력이 생겼고 고위험군 임산부가 되셨다. 그러므로 맥수술을 필수로 해야 한다. (엉엉... 너무 슬프고 무섭고 싫다. 맥수술 때문에 까꿍이가 떠난 것 같아서 맥수술 자체가 트라우마다. 앞으로 임신하면 그냥 병원에 입원해서 10달 동안 누워 있고만 싶은 심정이다.) 계속 누워 있을 필요는 없지만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임신을 한다면 무조건 대학병원으로 산과를 다녀야 한다.
10. 젖이 나올 수도 있는가?
답 : 20주라 안 나올 수도 있지만 집에 가면 압박붕대로 가슴을 압박하길 추천한다. (이틀 뒤부터 젖이 나왔다.)
남편과 궁금했던 모든 걸 여쭤보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시원했다. 일주일치 항생제와 진통제를 처방받고 항생제 주사를 맞고 퇴원을 허락받았다.
퇴원 수속을 하고 온 남편이 병원비가 353,250원이란다. 나는 와 병원비가 진짜 싸는구나 싶었다. 나에게 너무나 큰일이었는데 입원도 했고 분만도 했고 주사와 수액도 진짜 많이 맞았고 의사 선생님, 간호사선생님들도 밤을 같이 새 줬는데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35만 원이라니... 35만 원 정도의 슬픔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렸다.
퇴원을 준비하며 짐을 챙기는데 남편이 계속 아무것도 하지 말고 움직이지도 말란다. 왔다 갔다 혼자 바쁘다. 그리고는 어디서 휠체어를 구해왔다. 병원이 너무 커서 걸으면 안 된단다. 간호사 선생님이 퇴원 전 수액 바늘 뽑아주며 “남편분 자상하죠? 너무 자상하네요. 이것저것 다해주고. 퇴원할 때 휠체어 가져오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다 걸어서 집에 가는데" 라며 웃으셨다. 나도 우리 남편이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었나 싶다. 며칠 사이 우리 부부는 천둥 번개를 맞고 천지가 개벽되어 거의 새 사람이 된 게 분명하다. 정말 너무 큰 죗값을 치렀다.
퇴원 전 외래 예약을 확인하고 퇴원 주의 사항 안내문을 설명 듣고 일주일치 약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남편은 약이 오기 전까지 구청, 동사무소, 보건소, 장애인센터 등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휠체어를 대여했다. 그냥 걸어도 된다는데 남편은 굳이 굳이 휠체어를 대여해야 된다며 산후조리하는 3주간은 절대 무리 하지 말아야 한단다. 요즘 날이 좋아 주말에 답답하니 휠체어 타고 공원 산책 가잖다. 그래 고마워 남편. 여기저기 전화하더니 결국 진짜 휠체어를 빌렸다. 슈퍼맨이 따로 없네 우리 남편.
드디어 약을 받고 집으로 가기 위해 입원복을 벗고 내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을 꺼냈다. 이 옷은 내가 요실금에 걸렸는 줄 알고 느릿느릿 병원을 가며 입었던 옷. 아이를 보내고 제일 괴로운 것은 양수가 새는지 모르고 태평하게 하루를 보냈던 나의 모습이 떠오를 때다. 그 모습이 떠오르면 정말 너무 괴롭다. 그래서 그때 그 옷을 다시 입는 게 싫었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 옷 밖에 없다. 당시 정말 급하게 입원을 하고 내 옷을 아무렇게나 가방에 넣었었다. 트렌치코트를 꺼내고 원피스를 꺼내고 원피스 안에서 속옷이 나오고 양말도 나오고 그리고 뭔가 휴지 뭉치 같은 게 나왔다. 나는 남편에게 이게 뭐지? 하며 종이를 폈는데 정말 왈칵 오열하며 고함을 쳤다.
아악!
엉엉 엉엉.
엉엉.
엉엉.
그날 요실금인 줄 알고 팬티형 패드를 차고 갔었는데 양수로 다 젖었던 그날의 패트였다. 우리 까꿍이가 둥둥 떠다니며 놀았을 새어버린 양수. 그날의 바보 같은 내가 떠오르고 까꿍이의 흔적이라는 생각과 내 안에 까꿍이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또 괴롭게 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 로비로 나오니 대학병원은 정말 컸다. 구급차로 실려왔었기 때문에 병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는데 이런 곳이구나. 하늘은 잔인하게 맑고 푸르렀다. 모든 식물과 나무가 잠에서 깨어나 푸르기 빛나고 있었다. 참 예쁜 병원이구나.
이 사진은 5월 4일 아침 까꿍이를 분만했던 병실을 나오며 찍었던 사진이다. 어두운 분만실인 줄 알았는데 커튼을 걷으니 이렇게 잔인하게 하늘이 맑았다. 이 사진을 왜 찍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남편과 나는 말없이 병원을 나와 도로를 달렸다. 셋이었는데 둘이 되었구나. 허망함에 멍하기만 했다. 신호를 기다리는데 남편이 펑펑 운다. 결혼하고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 없는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 안 하는 강인한 사람. 슬픔이란 걸 한 번도 표현한 적 없던 남편이 펑펑 운다. 오래도록 눈이 다 빨개지고 콧물이 나올 정도로 운다. 나는 남편의 울음에 너무도 놀라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러다 나도 남편과 함께 아무 말 없이 큰소리로 펑펑 오래도록 울었다.
남편과 나의 대성통곡.
남편과 내가 부모가 되는 시간.
서툰 부모의 눈물이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다음날 남편이 다 잘 될 거라고 아차산 절에 까꿍이 등을 달아주었었다. 집에 가기 전 그곳에 잠깐 들러 까꿍이 등도 보고 초도 올리고 가자고 했다. 절에 도착해서 수많은 등 중에 까꿍이의 등을 찾는 남편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내가 이렇게 슬픔에 잠식되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이유는 남편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남편.
까꿍아 사랑해.
부디 좋은 곳으로 가렴.
일주일 만에 홀 몸이 되어 집에 왔다. 내 침대 베개 앞에 놓인 까꿍이 유골함을 마주하고 유골함을 껴안고 무너져서 한참을 소리 내 울었다. 까꿍이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고 언니와 엄마가 집에 와 다 같이 또 펑펑 울었다.
다시 마주한 나의 까꿍.
언니와 눈물.
엄마와 눈물.
널 바라보며 계속 울고 또 울고.
언니는 야채와 고기 그리고 산후조리에 필요한 물건을 왕창 사 왔고 엄마는 조용히 미역국을 끓이고 남편은 미친 사람처럼 집에 있는 잡동사니를 다 버리고 까꿍이 물건들도 다 정리를 했다.
나는 울고 울고 또 울다가 흰자가 퉁퉁 부어 검은 자를 가리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급하게 안과에 갔다. 눈 흰자에 부종이 생겼단다. 알레르기나 건조해서 그랬을 거라고. 혹시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러냐고 하니 그런 건 아니란다. 가혹하게도 눈이 아파 울고 싶어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남편이 매시간 눈에 안약을 넣어주었다. 부종이 생긴 이후로 내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엄마와 남편과 저녁을 먹고 좌욕을 하고 항생제를 먹고 계속 울고 싶었는데 꾹 참으며 잠을 잤다. 그러다 새벽에 잠에서 깨 까꿍이 유골함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다 지금이라도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까꿍이 유골함을 배쪽으로 가져와 품에 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