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만든 이상한 믿음
임산부가 되고 보통의 임산부가 준비하는 모든 것을 준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금기 사항과도 같은 것이었다. 금기 사항 중 몇 가지는 남들이 들어도 납득이 가는 이유였지만 많은 것들이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이유에서 금기시되었다. 나중에는 이것들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임신이 유지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어기면 임신 40주 종주가 물거품이 될 거야! 내 안에서 이상한 믿음을 만들어내며 마치 도를 닦는 사람처럼 규칙을 지켰다.
임신 기간 동안 절대 금기 사항이었던 것들을 나열해 보자.
임밍아웃, 태아보험, 출산용품 구매, 초음파 앨범 만들기, 아기 인스타 만들기, 태교 바느질, 태교여행, 조리원예약, 아기방 만들기, 배냇저고리 만들기, 육아 용품 당근 하기, 임신 아기 어플, 집안일, 외출 등등.
제1 금기 사항은 이전 글에서 길게 이야기한 임밍아웃이었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남편 외에는 아무도 몰라야 했다. 우리는 이 금기 사항을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지켰고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았다.
제2 금기 사항은 출산용품 구매였다. 우리는 출산 전까지 출산용품을 단 하나도 구매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남편의 요청 사항이었다. 이전에 20주까지 임신을 했던 나는 남편과 함께 보통의 임산부처럼 신나게 아기 용품을 준비했었다. 육아 용품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당시 초보 예비 엄마였던 나는 역방쿠가 뭔지 스와들업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씩 알아가는 게 참 재밌었는데 특히 핫딜이 떴을 때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를 하거나, 당근에서 득템을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아기 물건들이었는데... 20주에 아기를 보내고 모든 물건을 처분해야 했다. 나는 차마 아기 물건을 마주할 수 없어 용품이 정리될 때까지 이불을 뒤 짚어 쓰고 울었고 그 수고로움은 남편의 몫이었다. 당시 속으로 많이 아팠던 남편은 출산용품 구매를 최대한 뒤로 미루길 원했다. 아무리 낮은 가격의 핫딜이 올라와도 그냥 그렇게 흘러 보냈다.
당시 처분했던 육아 용품의 거의 대부분이 당근으로 구매한 물건이었다. 남편은 나중에 두고두고 그것이 미안하여 태어날 아기 물건은 모두 다 새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중고는 절대 안 되고 아무리 잠깐 써도 새것이어야 된단다. 당근은 절대 금지야! 그렇게 임신을 하자마자 우리는 당근 어플을 삭제했다.
새 용품으로 준비하지 않아 아이가 떠나버렸던 걸까?
시간이 지나도 해주지 못한 미안함에
마음이 참 많이 아팠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거야.
절대 섭섭하지 않게 해 줘야지.
세 번째 금기 사항은 태교 바느질이었다. 바느질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최고의 취미였다. 이전 임신 때는 뱃속 아기를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배냇저고리도 만들고 신발도 만들고 애착 인형도 만들었었다. 하지만 중기 유산을 했고 내가 만든 배냇저고리와 신발, 손싸개, 애착 인형은 한 줌의 재가 될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되어버렸다. 아이의 가는 길 외롭지 않게 잘 넣어서 화장을 해달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마치 내가 태교 바느질을 시작하면 뱃속의 아이가 떠나버릴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믿음.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렇게 중기 유산의 트라우마는 많은 금기 사항을 만들었다. 아기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에게 큰 트라우마이자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남편과 나는 혹시나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 지레 겁을 먹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출산 준비를 미루었다. 임신을 확인하자마자 예약을 해야 하는 조리원도 25주가 넘어서까지 예약하지 않았다. 보통의 임산부라면 초음파 앨범을 사서 사진을 소중히 간직했겠지만 나는 그냥 상자에 넣어 보관했었다. 혹여나 아기를 또 보낸다면 예쁘게 꾸민 초음파를 불태워야 한다. 참으로 슬픈 그 일을 미리 방지하자.
임신을 할 때면 신나게 깔았던 임신 어플도 깔지 않았다. 임신 어플을 깔면 매주 아기가 어떻게 커가는지 깜찍한 캐릭터로 보여준다. 소중한 태명을 달고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어플의 캐릭터를 보고 있자면 마치 진짜 내 아기 같아 마음이 행복으로 가득 찬다. 총 세 번의 유산을 했고 유산을 할 때마다 어플을 지웠다. 어플을 지울 때마다 아기와 진짜 이별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엔 안정기가 될 때까지 어플을 깔지 않았다. 내가 한 모든 행동이 아픔의 화살이 되어 돌아올까 봐 두려웠다.
중기 유산이라는 이력에 자궁경부가 짧은 나는 고위험 임산부로 분류되어 외출을 할 수 없었다. 임신 기간 대부분을 누워있었는데 중기가 되어서는 아예 집안일조차 조심스러웠다. 갑자기 예전처럼 양수가 터져 아기가 쏟아질 것만 같은 두려움. 그래서 매주 팔자에도 없는 가사도우미를 불렀다. 태아 보험을 가입하고 싶었지만 중기 유산 이력으로 쉽게 가입이 어려웠다. 설계사에게 이전 이력을 말하며 투닥거리는 게 도무지 싫어 처음부터 알아보지도 않았다.(하지만 중기 유산 이력이 있는 산모라면 조산의 위험이 있으므로 필히 가입하기를 권합니다.) 태교여행은 임신 전부터 포기했었고 만삭 사진 역시 찍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전 임신 때 집에서 혼자 만삭 사진을 찍고 이제는 괜찮겠지 하며 19주에 아기 인스타를 만들었었다. 거기에 예쁘게 찍은 만삭 사진도 올리고 회사 사람들에게 임밍아웃을 했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인 20주에 양수가 터졌고 아기를 보내야 했다. 만삭 사진 찍으면서 무리를 해서 그랬던 걸까? 이틀 전 남편과 강화도로 짬뽕을 먹으러 간다고 무리해서 그런 걸까? 신이 질투하도록 인스타에 아기를 자랑해서 그랬던 걸까?
최대한 가만히 있자.
아무것도 하지 말자.
추억 같은 거 만들지 말자.
너를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 하지 않아도 돼!
2년 전에 이사 온 집은 새집이었다. 모든 것이 새것이었다. 아가 여기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 너를 기다려. 네가 태어나면 깨끗한 욕조에서 수영하라고 2년 동안 엄마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저기 아빠방 옆에 작은 방은 너의 방이 될 거야. 엄마가 네가 태어나면 예쁘게 꾸미려고 깨끗하게 비워뒀어. 나중에 예쁘게 꾸며줄게. 지금 당장 꾸미고 싶지만 너를 낳으면 꾸밀 거야.
아기방을 꾸미는 것 역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 사항이었기에 마음속으로 가구를 넣었다가 아기 침대를 넣었다가 다시 벽에 모빌을 걸고... 상상 속 아기 방을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