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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대방출, 감정의 재고 정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by 따뜻한 수첩


감정 선물 가게의 마지막 날. 나는 묵은 감정들을 모두 꺼내 보기로 했다. 오늘은 창고 대방출의 날이다. 보기 싫은 감정들을 마구잡이로 밀어 넣은 방.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뤄온 그 방. 외면하고 살면 편하지만, 문득문득 떠올라 마음을 찌푸리게 만들던 그 방. 오늘은… 그 공포의 방문을 연다.



#1 가장 깊숙한 곳, 들여다보기.


깊숙한 곳을 들여다본다. 아주 오래된 감정 뭉치를 발견했다. 감정은 이름표를 붙여주면 가벼워진다. 오늘 내가 마주한 유적은 '불안'이다. 내 불안 속에는 엄마의 삶이 들어 있었다. 아픈 시어머니를 돌보며, 제사 준비와 일을 병행해야 했던 엄마의 고단함. 그 속엔 한숨, 짜증, 날 선 말들이 서려있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며 그 불안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불안은 방 한 구석, 아무도 손대지 않는 곳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유적을 발굴하고, 먼지를 털고, 조심스레 이름표를 붙였다.


감정 정리는 고고학과 닮았다. 공룡 뼈 조각을 맞추듯, 감정의 조각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붙여 나간다. 단번에 해치우지 않아도 괜찮다. 치우기 쉬운 감정부터 하나씩 꺼내도 된다. 원래 창고 대방출 세일도 ‘딱 3일’만 한다더니 몇 달씩 하는 거 다들 알잖아요.



#2 타버린 냄비는 무시하는 게 속편 할까?


회피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튀어나온다. 짜증, 게으름, 도피, 분주함… 그 뒤에는 언제나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숨어 있다.


타버린 냄비를 깊은 찬장 속에 처박아두면 당장은 속 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냄비가 또 눈에 밟힌다. 한 번 마음먹고 꺼내 씻으려 들면, 씻어도 씻어도 검은 물이 계속 나온다.

“이야, 이거 괜히 건드렸나?” 싶은 순간이 온다. 그래도, 버리지도 못하고 보관하지도 못할 냄비를 찬장 속에 그냥 둘 수는 없다. 하루 안에 새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은 내려놓자.


잘 불려서, 조금씩 벗겨내다 보면 언젠가는 원래의 모습이 드러난다. 방치된 감정은 썩지만, 이름 붙인 감정은 살아나 나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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