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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오 Nov 08. 2020

걷기: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시간

생각이 복잡할 땐 일단 나가서 걸어보자

"심란할 때 걸으면 생각이 맑아져. 맑은 정신으로 나를 돌보면서 다시 성장하는 거지."


직장 생활로 지친 내 친구에게 건넨 말이었다.



나 또한 친구처럼 힘들었을 때 정처 없이 나가서 걸었던 시간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으로 가서 무작정 걸었다. 그때가 봄기운이 가득했던 2012년 4월이었다.






  편입 시험에 합격하고 여러 행정처리를 거친 후 드디어 개학 날을 맞이했다. 학교 광장에 첫발을 내디뎠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세상이 내 것 같았다. 광장 주변에 길게 들어선 카페와 식당, 서점, 그리고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 모두 아름다워 보였다. 지난 수험생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노력하여 얻은 결과물이 정말 달콤했다. 승리하여 쟁취한 편입학이니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


  부푼 기대를 안고 교실로 향했다. 사실 편입생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차별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교수님들도 친절하셨고 재학생들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생각보다 많은 편입생 선배들이 있어서 도움을 받아 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다.


  수업을 들어보니 확실히 2년제와 차이가 있었다. 전 대학이 실습 위주였다면 4년제 대학은 학문적인 부문에 더욱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진도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고 매 수업마다 주어지는 과제와 팀 프로젝트가 상당했다. 특히 100% 영어로 진행되는 원어민 수업은 나에게 시련을 주었다. 편입을 공부했던지라 영어에 거부감은 없었으나 'Real 원어민'이 속사포로 내뱉는 영어는 나의 정신을 흔들어놓았다.


  그래도 신선함 즐거움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나중에는 원어 수업이 학점을 잘 받는 효자 과목이 되었다. 낯섦과 적응이 공존했던 3월 한 달. 차츰 마음에 맞는 친구들도 사귀게 되고 즐겁게 팀 프로젝트도 하면서 4월을 맞이했다. 학교 곳곳에 있는 벚꽃 나무에서 예쁜 벚꽃이 흩날렸고 '낭만'이 학생들 마음속에 씨앗을 뿌리고 꽃을 피웠다.


  모두 여유로워 보였고 들판에 앉아 점심을 먹는 친구들, 수업을 끝마치고 무리 지어 어디론가 놀러 가는 친구들도 보였다. 다들 봄을 즐기는 듯했다. 나는 어땠을까. 그들과 달리 내 마음속에는 봄바람이 불지 않았다.


  어느 순간 학교 생활이 적응되니 긴장이 풀렸고,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온 후유증이 한꺼번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입맛도 없고 영화를 봐도 재미있지 않으며 그 좋아하던 옷을 사도 감흥이 없었다. 학우들과는 그저 형식적인 대화 정도 오갔고 심지어 어느 친구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며 '사람에 대한 회의감'도 급격히 상승했다. 전 대학 친구들은 다른 건 몰라도 의리 하나는 최고였기에 대조되는 부분이었다.


  한번 감정 선이 틀어지니 수업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멍하니 밖을 바라보는 날이 더 많았다. 설상가상 지독한 독감까지 걸린 바람에 내 마음속에는 폭풍이 휘몰아쳤다. 역시 인생 쉽지 않다. 좀 잘 풀리나 싶으면 어김없이 망할 놈의 시련이 비웃으며 찾아온다. 그렇게 공허하게 허비한 시간이 일주일이었다. 스스로가 약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들어온 대학에 와서 갑자기 번아웃이라니.


  이건 아닌 것 같아 학교 도서관을 찾아갔다. 책이라도 읽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이 구역 저 구역 돌아다니면서 여러 책을 들춰보다가 한 문장을 읽게 됐다.



  살다가 모든 것이 힘들고 지칠 때 나가서 걸어라



  따지고 보면 별말 아닌데 이상하리만큼 그때는 저 문장이 또렷하네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내가 보길 기다렸다는 듯이 빛이 났다. 그래. 걸어보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없이 걸어보자.






  그날 수업이 끝나고 평소에 좋아했던 경복궁으로 향했다. 경복궁은 참 아름다웠다. 그 뒤로 보이는 북악산의 수려함은 그림과도 같았다. 옛 조선의 정취를 담은 모습을 눈에 담으며 삼청동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 여러 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다들 한복을 입고 즐거워하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사진을 찍고 주전부리를 즐기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한국이란 공간에서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봄 하늘은 참 맑았고 새하얀 구름은 둥실 떠다녔다. 삼청동을 지나 북촌 한옥마을로 넘어갔다. 삼청동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지역이지만 분위기가 조금 더 활기찼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고 얼떨결에 외국인에게 길도 알려줬다. 길가에 보이는 카페에는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다시 삼청동까지 걸어오고 안국역으로 넘어가 부지런히 걸었다. 걷다 보니 어느새 종로3가역까지 오게 됐다. 꽤나 긴 거리를 걸어오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없어지고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간판 모양도 하나하나 새롭게 다가왔고 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하늘의 모습, 자동차들의 움직임, 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도 조금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지 걷는 순간순간들을 온전히 느끼게 됐다. 뭔가 살아 있음을 느꼈다.

무엇보다 내가 무기력함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다른 사람들은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거나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아차 싶었다. 아 이래서 걸으라고 한 것이구나. 번아웃이든 우울함이든 뭐든 부정적인 상태일 때는 내가 처한 상황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가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부정하고 환경을 탓하며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곳에 가면 낯선 공간이 주는 신선함과 다양한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체로 색다른 자극이며 무기력한 나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설령 매번 같은 공간을 배회한다고 하더라도 잠시 주변을 의식적으로 둘러보며 걸으면 평소에 지나쳤던 것들도 조금 더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얽매였던 문제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조금씩 회복시킨다. 그래서 예술가들이나 기업의 CEO들이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생각이 풀리지 않을 때 산책을 하는 것 같다. 의학적으로도 걷기를 하면 뇌를 회복시키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이 분비된다고 하지 않던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압박을 받은 우리 몸과 마음을 걷기를 통해 풀어주는 것이다. 조금 더 관심을 갖고 주변을 관찰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나 자신을 살펴보자. 진부했던 것들이 가치 있어 보이기 시작하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내가 무너지는 순간 다른 누군가는 너무나도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이 복잡할 때 하던 것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 걷는다. 앉아서 고민만 하고 있는다고 풀리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서 사람 구경도 하고 하늘도 쳐다보며 주변을 온전히 느낀다. 그럼 몸과 마음도 가벼워지고 빽빽하게 채워진 내 머릿속도 조금씩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든다. 또한 내가 현재 무엇에 힘들어하는지를 심각하지 않은 감정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다.


  사람이 우울하면 별거 아닌 것도 과장해서 받아들이곤 한다. 걷기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니 자신을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줄어들어서 좋다.


  걷고 돌아오면 정신이 맑아진 상태다. 다시 맑아진 정신으로 상황을 잘 판단하여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간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성장을 위해 나아간다.



  감정이 격해지고 복잡한 생각으로 괴롭다면

  번아웃이 온 것처럼 만사가 귀찮고 무기력하다면

  나 자신이 한심하고 불쌍하게 느껴진다면


  그냥 밖으로 나가서 무작정 걸어보자.

  세상이 우릴 반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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