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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오 Sep 20. 2020

편입 공부에서 배운 '할 수 있다' 정신 (2)

이 악물고 버티면 된다

"난 네가 걱정이 하나도 안돼. 어차피 붙을 건데 뭐하러?"


무너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친한 친구를 찾아갔을 때.

그 녀석이 나에게 던진 말이었다.


세상 퉁명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던진 말이었지만 나에겐 그 어느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교수님과 면담을 마치고 수업을 마친 후 곧장 집으로 가서 편입에 대해 조사했다. 편입 시험은 오직 '영어'로 승부를 본다. 전적대 성적 2년 치를 보기도 하지만 거의 편입 시험 그 자체로 합격 판가름이 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시험 당일 전국에서 '한국식 영어 시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대거 몰린다. 천하제일 편입영어 대회인 셈이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높디높은 수준에 당황 했지만 그 자체로 나에겐 색다른 자극이었다.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한 주 동안 온갖 인터넷 글과 후기들을 읽으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는지 조사했고 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책들을 모조리 구입했다. 단어책, 독해책, 문법책, 구문책, 기출문제집 등 한 가득 담았다. 학원을 다녔으면 좋았겠지만 저번 글에도 언급했다시피 당시 집안 사정이 안 좋았다. 내가 준비했을 때 편입 학원비가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독학'을 하기로 결정했다. 독학으로 합격한 사례도 많아서 용기를 얻었던 찰나였다.


  편입 영어는 일반적인 영어와 결이 '많이' 다르다. 도대체 이 단어를 원어민들이 쓸까? 싶은 온갖 단어들이 가득했고 한국어 해석을 봐도 이해가 안 가는 난해한 문장들이 즐비했다. 우스갯소리로 미친 단어, 미친 독해라는 말이 있는데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이걸 넘어야 4년제 대학 타이틀을 딸 수 있으니 눈과 귀를 닫고 오직 공부에만 몰입했다. 학교 가기 2시간 전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공부하고 등교했다. 학교까지 가는 시간이 약 1시간 조금 넘었기에 가는 동안에도 계속 단어를 외우고 문제를 풀었다.


  나에게 편입을 권유하셨던 교수님께서도 나의 편의를 위해 수업시간에 편입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정말 죄송스러웠다. 하지만 교수님은 하나도 개의치 않으시며 격려해주셨다. 크나 큰 은혜를 갚기 위해선 내가 당당하게 합격하는 것뿐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외국어 1등급이라서 기초체력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도 살랑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편입 영어라는 바람에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어찌나 어렵던지 푸는 문제 족족 틀리고 해석도 안되어서 한 지문 가지고 몇 시간씩이나 씨름한 적도 있다. 카페 글이나 커뮤니티를 보면 다들 쉽다는데 왜 나는 어렵지? 여태 영어를 헛공부 한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다니는 헬스장에서 만난 캐나다인한테 문제집을 들고 가서 물어보기도 했다. 그 역시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도 문장을 읽더니


"Oh my... I've never seen such tough sentenses even in my country..."

- 세상에... 내 고향 캐나다에서도 이렇게 어려운 문장들을 본 적이 없어요-


라고 말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었다. 원어민도 혀를 내두르는 영어를 토종 한국인이 하고 있다니. 내 팔자도 참 기구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캐나다인의 표정이 머리에 생생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계속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부지런히 공부했다. 본 것을 또 보고 푼 것을 다시 풀었으며 외웠던 것을 또 외웠다. 특수 부대원들이 총기 분해 및 조립을 신속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반복 연습' 덕분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게 어려운 편입 영어를 이겨내려면, 그것도 학원의 도움 없이 합격이라는 열매를 따내기 위해선 반복 연습밖에 없었다. 허리가 아프면 누워서 쉬었다가 다시 앉아 공부했다. 뜻대로 안 돼서 속상할 때는 눈물이 났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야만 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이런 고난에 대한 불평은 사치였으니까. 그래야만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다리가 안 움직였다. 허리가 괜찮길래 며칠 장시간 앉아서 공부했더니 허리디스크가 다시 도진 것이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요추 주변에 염증이 심하게 생겼단다. 참 인생 쉽게 가는 법이 없다. 시험이 코앞인데 시술을 받게 생겼다.


"코지오님, 2주는 되도록 앉아 있으면 안 돼요. 아니 좀 조심하지 왜 또 무리한 겁니까."


  의사 선생님한테 호되게 혼났다. 검사를 받은 당일 염증 제거 시술을 받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서러웠다. 내 인생은 잘되는 꼴이 없나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좀 오르나 싶더니 허리디스크로 인생 나락으로 떨어졌고, 허리가 나아서 좀 살만하니까 갑자기 가세가 기울고, 편입 공부가 몸에 익어가는 와중에 다시 허리가 말썽이었다. 신이 내 앞에 있다면 있는 힘껏 때리고 싶었다. 아무리 시련을 주어 성장을 도모한다 한들 때를 가려야 하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 후 맞이한 2주는 마치 지옥 같았다. 앉아서 제대로 공부를 못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서서 공부하거나 누워서 공부하거나. 실제로 두 가지 다 했다. 서서 공부할 수 있는 책상을 구매해서 공부했고 다리가 아파 누워서 공부할 때면 머리 위에 조명을 틀어 책을 봤다. 합격을 해야 한다는 그 마음가짐이 없던 초인적 힘도 발휘하게 만들었다. 지옥은 지옥인 것이고 공부는 공부인 것이었다. 책을 들여다보는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드니 나 스스로가 소름 끼칠 때도 있었다.


  다시 허리가 회복되고 조심하며 공부를 이어나가길 몇 개월. 대망의 2011년 12월 편입시험 시즌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가고 싶었던 대학 편입 시험이 첫날이라서 온 힘을 쏟아부었다. 결과는 찢어진 종이조각처럼 형편없었다. 첫 시험을 그렇게 말아먹으니 페이스가 제대로 깨졌다. 그다음 대학들도 예비 1번, 예비 7번 등 추가 합격이라는 희망고문 따위도 들먹이지 못할 결과를 마주해야만 했다. 기출문제나 학원 사설 모의고사 따로 구해 풀 때 나쁘지 않았는데 시험 당일만 되면 엉망징창이었다. 아, 세상엔 고수가 너무 많았다.


  편입 시험을 치른 지 중간 정도 됐을 때 친한 친구에게 연락했다.


"소주 한잔 할까."


  내 친한 친구들은 안다. 소주를 잘 안 마시는 내가 소주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다는 소리라는 것을. 한 걸음에 달려 나온 내 친구와 나는 동네 근처 포장마차에 갔다. 세상 죽어가는 표정을 지으며 소주를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시는 날 보며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빈 속에 깡소주를 연속으로 들이키니 취기가 확 올랐다.


"나 어떡하냐 진짜."


  이 말을 들은 친구의 다음 말이 압권이었다.


"너 정말 x신이다. 어디 가서 2%의 남자라고 떠들고 다니지 마. 쪽팔리네."


  예상치 못한 말에 난 어안이 벙벙했다.


"난 네가 걱정이 하나도 안돼. 어차피 붙을 건데 뭐하러? 붙을 양반이 이렇게 소주를 잡수고 있으시니 축하주(酒)라고 생각하면 되냐? 야, 찌개 식어. 얼른 먹어."


  난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먹는 모습도 참 복스럽다. 고마웠다. 지금 겪고 있는 내 좌절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같은 말로 날 다독여줬다.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 연민에 빠진 나를 뺨을 한 대 후려치며 정신 차리게 해 준 친구가 참 고마웠다.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며 위로했으면 난 더 무너졌을 것이다. 친구의 말은 나에게 큰 기폭제가 되었다.






  남은 대학은 세 곳. 심기일전으로 독을 품으며 마무리 공부를 했고 고사장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떨어져도 그만 붙어도 그만이라는 나름 대범한 생각으로 시험에 임했다. 그 사이 2012년 새해가 되었고 2월 초순쯤 모든 시험일정을 소화했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며 차분히 결과를 기다렸다.


  2월 중순. 그동안 못 봤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는 데 문자가 하나 왔다.


"띠링."


  날씨가 추워서 그냥 집 가서 보려고 했는데 그날 무슨 기분인지 괜히 문자를 보고 싶었다. 주머니 깊숙이 쿡 찔러 넣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코지오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입학 설명회는 이번 주 2월 16일 목요일이며 장소는...'


  합격 문자였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쳤던 대학에 합격을 한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는 건가. 나도 모르게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이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는 장면이 있지 않던가. 내가 그랬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난 소리를 지르며 횡단보도를 건넜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가족에게 합격소식을 전했고 할머니와 우리 부모님은 나를 안아주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고생했다, 미안하다란 말이 오갔는데 그 말을 들으니 속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짧은 신호음이 참 길게 느껴졌다. 몇 번의 신호음이 더 지나고 교수님이 받으셨다.


"여보세요?"


"교수님, 저 합격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기쁨에 넘쳐 세상 호탕하게 웃으시는 교수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1년 간의 대장정.


  나는 오직 책과 볼펜 그리고 공책을 벗 삼아 공부했다. 그 어떠한 학원 강의, 인터넷 강의도 수강하지 않았고 혼자의 힘으로 해결했다. 부모님은 아직도 그때 내가 학원을 다니며 더 전문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미안해하신다. 난 두 분께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라고 말한다. 그저 내 옆에서 끝까지 응원해주신 것만으로도 나에겐 크나 큰 축복이었고 행복이었다고 말씀드린다. 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으니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편입 시험을 처음 준비할 때는 두렵고 무서웠다. 오랜 기간 공부하며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그 치열한 레이스를 내가 과연 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다. 하지만 이 악물고 버텼다. 포기 하기에는 내 욕망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말을 세뇌하듯 읊조렸고 마음 깊이 새기며 공부했다. 아픔을 극복했던 근성이 빛을 발휘했고 이 근성은 시간이 세월을 머금으며 '할 수 있다'의 정신으로 발현되었다. 버티고 버티며 노력하면 나란 사람도 달콤한 열매를 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인간의 삶은 지독하리만큼 온갖 역경으로 가득하다. 모든 역경을 다 해결할 순 없지만 적어도 슬기롭게 대처하며 옆으로 흘려보내는 능력은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난 편입시험을 공부하면서 이 능력을 많이 기를 수 있었다. 글로 다 담지 못할 만큼 힘든 일도 많았고 괴로운 일도 많았다. 그러나 어찌어찌 걷다 보니 그러한 일들도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지금도 난 수많은 어려움을 마주한다. 하지만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라며 나 스스로를 다독인다. 더한 것도 해봤다는 자신감과 경험이 여유를 만들어낸다. 근성과 여유가 합쳐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에너지를 생성한다.



  지금의 나는 그 에너지를 벗 삼아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어 주신 권현재 교수님

나에게 큰 힘이 되었던 친구 유준현

끝으로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 항상 응원해준 나의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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