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함
2021년 12월에 새로운 전기장판을 구매했다. 12년 동안 쓴 전기장판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전원이 간헐적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끝내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부터 사용한 것이었다. 겨울에 집에 있으면 그 전기장판 위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판에 앉아서 귤을 까먹었고, 엎드려서 만화책을 읽었고, 누워서 공상을 즐겼다. 잠도 푹 잤다. 구청 청소 업체가 망가진 전기장판을 수거해 갈 때 기분이 묘했다. 정든 물건과의 이별은 사람과의 이별 못지않게 무거운 것 같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전기장판을 구매하러 집 근처 백화점에 방문했다.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하다가 직접 보고 사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갔다. 전기장판은 가전·가구 층에 있었다. 층에 다다르자 번쩍이는 전자 제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자 제품들은 오와 열에 맞춰서 도열해 있었다. 월요일 오후였는데 사람이 많았다. 혼수를 준비하는 신혼부부도 있었고 마실 나온 주부들도 있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TV, 에어컨, 냉장고, 청소기, 공기 청정기를 구경했다. 그곳의 판매 사원들이 테이블에서 고객을 상담하고 있었다. 어떤 판매 사원들은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분주해 보였다.
전기장판 판매점은 그곳에서 대각선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변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없었다. 조용한 환경에서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할머니와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판매점에 들어가니 한 직원이 웃으면서 맞이해주었다. 그는 나와 할머니에게 원하는 전기장판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전자파 차단이 확실하고, 접어서 보관할 수 있으며, 색상은 어둡고, 가격은 30만 원 내외인 것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바로 세 가지 상품을 보여주었다. 각각 내가 말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개체별로 특장점이 다르다고 그는 설명했다. 전기장판을 사용하면서 겪을 수 있는 돌발상황과 대처 방법, A/S 접수 과정도 상세히 짚어주었다. 그는 30분 동안 정성을 다했다. 직원의 말은 친절했고 명확했다.
할머니와 나는 원단이 탄탄한 전기장판을 골랐다. 전기장판의 부자재 중에서 원단은 장판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원단이 무르면 쉽게 해진다. 그 위에 방석이나 담요를 올려놓으면 마찰에 의해 보풀이 생기기도 한다. 이번에 구매한 전기장판의 원단은 매끈하고 밀도가 높다. 날카로운 물체로 긁지 않는 이상 오랫동안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직원은 말했다. 결제를 하고 판매점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 직원이 다가와 작은 선물을 건넸다. 손소독제였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며 명함도 주었다. 그는 프로였다. 모처럼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이틀 후, 전기장판이 택배로 배송되었다. 전용 가방에 포장되어 왔다. 전기장판을 꺼내 거실 바닥에 펼쳤다. 혹시 몰라서 돌돌이 테이프로 장판 구석구석을 훑었고, 알코올 소독제도 뿌려서 한 시간 정도 말린 후 요 위에 깔았다. 그 위를 얇은 담요로 덮었다. 남색 빛이 도는 전기장판이다. 원단 표면에 다이아몬드 패턴이 새겨 있고 크기는 세로가 180cm 가로가 100cm이다. 체격이 큰 나에게 적당하다. 조작 버튼이 직관적이다. 버튼을 누르면 전기장판에 전원이 들어오고 다시 누르면 꺼진다. 온도 설정 범위도 넓다. 저온부터 고온까지 총 9단계이다. 다만 작동 시간이 12시간으로 고정되어 있다. 시간이 짧은 것보다 낫다. 짧으면 새벽에 깨서 전원을 켜야 한다.
장판 밑에 미끄럼 방지를 위한 고무 돌기들이 있다. 고무 돌기들은 장판에 흔들림 없이 부착되어 있다. 전에 쓰던 전기장판은 돌기가 없어서 쓰다 보면 장판 위치가 틀어지곤 했다. 새 전기장판은 사용해보니 그렇지 않다. 자리 잡은 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단단히 고정된다. 수시로 위치를 바로잡을 필요가 없어서 편하다. 전기장판 중에서 저온에 설정해도 너무 뜨거운 것들이 있다. 기본 발열 값이 과하게 높은 탓이다. 그런 장판에 오래 누워있으면 두통이 생기거나 사람에 따라 가슴 답답함을 호소한다. 자칫 저온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새 전기장판의 열은 적당하다. 심하게 뜨겁지도 약하지도 않다. 은은한 온기가 이불처럼 몸을 감싼다.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온기의 소중함은 크게 느껴진다. 종일 찬기운에 휘돌린 손발과 몸과 머리를, 전기장판의 온기가 녹여준다. 덕분에 나는 밤새 깊은 잠을 잔다.
새로운 전기장판을 들인 지 두 달째이다. 지금까지 문제없이 사용하고 있다. 기분 좋게 구매한 물건이어서 애착이 간다. 이 전기장판이 없었다면 값비싼 가스 요금을 내가며 겨울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가스비가 무서운 요즘이다. 적절한 시기에 잘 구매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12년 동안 쓴 전기장판에 익숙해서 그런지 새 전기장판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제는 제법 편하다.
2월도 벌써 중순이다. 곧 봄기운이 고개를 드는 3월로 접어든다. 3월에는 꽃샘추위가 있는데 바람이 날카로워서 겨울 못지않게 춥다. 그래서 전기장판을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달이다. 4월이 되면 봄이 세상을 덮는다. 기온이 올라서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봄꽃이 피어난다. 그때, 전기장판의 역할이 비로소 끝난다. 한 달하고 보름 남았다. 봄이 찾아올 때까지 전기장판의 따스함을 조금 더 누리려고 한다. 그 따스함 속에서, 나는 지나갈 겨울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봄을 기다릴 것이다. 나의 겨울은 전기장판을 징검다리 삼아 그렇게 봄으로 건너간다. 새로 산 전기장판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