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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지오 Feb 19. 2021

딱 세 번만 참으면 된다

무례한 자에겐 '매'가 약이다

"야, 너 내가 우습냐?"



그간 참았던 분노가 한 문장에 압축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이에 더해 짧고 굵고 알아듣기 쉬운 우리나라 고유의 몇 단어를 얹었다.


주변은 고요해졌고 저 말을 들은 당사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날 이후 내 아르바이트 생활은 편했다. 

어느 누구도 건들지 않았으니까. 



그래. 사람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만 참으면 된다.






서점에 가면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유튜브를 봐도 무례한 직장 상사나 동료의 언행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영상도 넘쳐난다. 이에 대한 콘텐츠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뜻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몸이 힘들면 버티기라도 하지만 정신이 힘들면 정말 답이 없다. 심할 경우 감정이 고장나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


매번 언론에서 집단 내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질책하는데도, 그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더 날뛴다. 나도 아르바이트부터 직장 생활까지 경험하며 온갖 종류의 인간을 만났다. 그들을 대하며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이뤄 말할 수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책도 읽어봤지만 딱히 도움이 되진 않았다. 다행히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나의 해법이 있다. 


바로,


딱 세 번만 참고 혼내주는 것



먼저 상대방이 나에게 아무리 바보 같은 짓을 일삼아도 참는다. 대신 아주 이성적이고 매너 있는 방식으로 잘못된 행동을 바로 잡아준다. 그렇게 세 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번 반복한다. 남들이 봤을 때 '와 저 사람 정말 보살이다. 잘 참네.'란 생각이 들 정도여야 한다. 이렇게 참았는데도 열 받게 하면 그때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한판 붙어야 한다. 선배든 동료는 후배든 상관없다. 계속 시비를 건다는 것은 날 호구로 본다는 뜻이다. 시간과 감정을 들여 예뻐해 준 강아지가 고마운 줄 모르고 이빨을 드러내고 덤벼들면 어떻게 하겠는가?


폭력을 행사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우린 교양인답게 '말'로 들이박으면 된다. 찔리면 아플 정도로 아주 날카로운 문장과 감정을 담아 던져야 한다. 경험상 소시오패스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본인 입과 표정 그리고 손에서 나온 불순물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해를 끼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본다. 그래서 강자에게 한없이 약하다. 


얼마나 역겨운가. 그들의 언행에 당하고만 있으면 우린 '계속 약한 사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도 이빨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20대 중반 때 일이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동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먼저 들어온 친구들과 마음 잘 맞았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잘 챙겨주신 점이 참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알바생이 한 명 들어왔었는데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이었다. 그런데 뭔가 첫인상이 별로였다. 왠지 친절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온 이후 평화로웠던 곳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늘 손님과 싸웠다. 별거 아닌 일에도 손님한테 날카롭게 말했고 그 분노를 애꿎은 사람한테 풀었다. 언제 한 번은 자신이 먹다 남은 빵을 버린 친구한테 '너 xx대 다닌댔나? 지잡대라서 그런가 행동도 돌대가리처럼 구냐?'란 말을 했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아직도 기억할까. 당시의 분위기가 생생하다. 그 쓰레기 같은 문장을 들은 친구는 얼굴이 사색이 됐고 나머지 친구들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은 눈치였다. 


내가 한마디 건넸다.


"에이 형, 말이 좀 심했어요. 비닐봉지 옆에 있길래 다 먹은 줄 알고 버렸겠죠. 우리 웃으면서 일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이 x끼가 형한테. 너도 지잡대 다니냐?"


제대로 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 자체가 정상인은 아니니까. 웃긴 건 사장님 앞에선 순한 양이었다. 그런 모습에 속으신 건지 우리가 사장님께 자초지종 설명을 해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면서 허허 웃고 넘기곤 하셨다. 불편한 동행은 계속됐다. 그는 주기적으로 손님들과 다퉜고 그렇지 않은 날에도 자기 기분이 안 좋으면 직원들한테 예의 없게 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사적으로 타일렀다. 


며칠이 지나고 매장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점심시간이 되자 주문이 밀려 들어왔고 우린 빵을 포장하느냐고 정신이 없었다. 나와 호흡이 맞는 친구들은 주문받은 빵과 박스를 일사 분란하게 주고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부족한 재료를 채워놓고 누군가 힘들어 보이면 자리를 교체하며 서로 챙겼다. 내 작업대에 있던 비닐 포장지가 떨어져서 포장지 보관함 앞에 서 있던 그 사람에게 한 박스 달라고 부탁했다.


"형, 죄송한데 포장지 한 박스만 부탁할게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계 소리 때문에 못 들었나 싶어서 몇 번 더 말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여유롭게 스마트 폰을 꺼내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봤다. 그런 수준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그간 억누른 분노가 터졌다. 난 이미 훌륭하게 세 번 참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내가 우습냐?"



버터와 기름으로 절인 장갑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그 사람한테 다가갔다. 


"미쳐가지고. 형 대우해주니까 짬 놀이하네? 여기가 군대야? 적당히 해야지, (뒷 말은 상상에 맡기겠다.)"


날 쳐다봤던 그 사람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너무 놀라며 쭈뼛쭈뼛 서 있었다. 그렇다. 우리한테 돼먹지 못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도 막상 면전에서 할퀴면 순간 얼어붙는다. 난 그날 작정하고 들이박았다. 할 말 못 할 말 전부 했고 아주 날카로운 감정들을 토해냈다. 재미난 사실은 그런 내 모습을 본 친구들이 내 편을 들며 그 사람을 나무랐다는 것이다. 나의 분노는 더 큰 힘을 얻었고 그는 더욱 초라하게 밟혔다.


앞에서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이성적으로 세 번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가 이처럼 유리한 여론 형성을 위해서이다. 화난다고 해서 바로 표현하면 나만 성격 억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남들이 인정할 만큼 매너 있게 인내하고 상대방을 지적하면 오히려 그들은 내가 화를 낼 때 내 편을 들어준다. 그동안 저 사람이 참아준 게 있는데 왜 또 시비를 거냐며 말이다. 


이후 그 사람은 적어도 나한테는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 눈치를 보며 며칠 더 일하다가 얼마 못가 스스로 그만뒀다. 그의 마지막 퇴근 날,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학벌, 지위, 나이, 직업, 인종 등을 내세우며 상대방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례한 자에겐 '매'가 약이다. 누군가는 무조건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참기만 하다가 더 심한 병이 나기도 한다. 주변을 보면 마음의 상처로 시름시름 앓다가 나가떨어지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이었다. 더 열 받는 것은 정작 우릴 힘들게 한 인간들은 버젓이 웃으며 잘 산다는 것이다.


상대가 지나치게 도를 넘는다면 강제로 끌고 내려와야 한다. 그들이 내 약한 모습을 본다고 해서 티끌만큼 공감할 것 같은가. 이때다 싶어 자기 밑으로 더욱 깔아뭉개려고 할 것이다. 분노 표출이 항상 나쁜 것이 아니다. 적당한 시기에 드러내면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훌륭한 방어법이다. 



절대로. 

비도덕적인 인간들이.

우릴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하자.


딱 삼 세 번만 교양 있게 참고.

그 이상부터는 화끈하게 혼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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