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술을 마시면 두통이 금방 생긴다. 속도 부대껴서 잠을 설치기 일쑤다. 예전에는 고깃집 음료수 잔에 소맥을 7잔 말아도, 생맥주 500ml를 연달아 세 잔 마셔도 멀쩡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마셔봤자 캔맥주 355ml짜리 한 캔이나 와인 한 잔이 전부다. 이 정도 알코올이 몸에 들어와도 눈앞이 아찔하다. 소주와 이별을 고한지는 한참 됐다. 점점 술과 소원해진다. 나는 술을 줄이는 중이다.
술은 인류와 연을 오래 한 음료다. 기원전 9,000년경 메소포티미아에서 이미 맥주를 만들어 마셨다고 하니, 술의 역사가 가진 장대함은 아련하다. 기원후에 태어난 나는 2010년, 20살이 되어서야 그 아련함이 기록된 술을 처음 접했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과 당당하게 호프집에 들어가 맥주와 소주를 주문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장장 12년 동안 온갖 문제집 풀이와 시험으로 지친 우리를 술은 어른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와 친구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술을 접할 자리가 늘었다. 대학교 MT, 동창회, 송년회, 신년회, 지인들과의 자리 등 여러 모임에 참석하며 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 기분 좋게 올라오는 취기, 취기의 힘을 빌려 말하는 이야기. 기름진 안주와 시원한 술이 우리 속에 꽈리 튼 고민과 걱정을, 머뭇거리는 희망과 기대를 표출시켰다. 우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술병이 늘어날수록 영웅의 무용담으로 변했다. 다음날 머리카락을 움켜쥐면서 내뱉은 말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술은 가난하고, 어수룩하고, 깜깜한 청춘의 날들을 추억으로 기억하게 해 주었다.
나는 대학생까지만 하더라도 술을 마시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사회인이 된 이후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술이 인간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직 생활에 찌든 나와 친구들은 술자리에서 밝은 내일을 그리지 못했다. 축 처진 어깨와 울상 짓는 표정으로 말없이 술잔을 들이켤 뿐이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은 그 어느 때보다 쓰고 맛이 없었다. 기운찬 목소리로 건배를 외쳤지만 잔은 힘 없이 부딪혔다. 취기도 금방 올라와서 우리는 비틀거리는 혀를 무책임하게 놀렸다.
술에 잔뜩 취한 우리는 자아를 부정하고, 희망을 부셔 먹고, 허공에 삿대질하고, 자리에 없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씹어 대면서 가엾은 정서를 마구 지껄여댔다. 그렇게 참혹한 시간을 보내고 술집에서 나와 맡는 새벽녘 공기는 참으로 허무했다. 밀려오는 비참함에 우리의 머리는 정신없이 흔들렸고, 발걸음은 방향성을 잃었다. 다음날 마주한 숙취는 그날의 나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일정한 주기로 올라오는 울렁거림에 의해 나는 사람보다 변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술이 거북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술자리에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술자리의 끝은 궁상맞은 푸념으로 가득할 것이 뻔했기에 가지 않았다. 술을 몇 달 안 마시다가 다시 마셔 봤지만 전처럼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시고 나면 허무했던 술자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몸은 술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에게 술은 돈을 축내고, 건강을 빼앗고, 기분에 잿밥을 뿌리는 존재가 됐다.
술 대신 새로운 음료가 내 인생에 자리 잡았다. 그것은 커피다. 우연한 계기로 유명 카페의 에스프레소를 접했는데, 고소한 풍미가 인상 깊었다. 이 맛있는 음료를 나만 즐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인들과 그 에스프레소 바에서 자주 만난다. 달콤한 설탕을 품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우리는 진중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깊이가 술을 마시면서 얘기했을 때보다 깊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간다. 말에 원망과 부정과 짜증이 뒤섞이지 않는다. 자리가 한결 편하다.
나는 술이 들어갔을 때 나오는 인간의 민낯을 피하고 싶어서 술을 줄였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민낯이 드러날 때 인간은 추잡스러워진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쓸데없는 대화에 집착한다. 대단하지도 않으면서 대단한 척을 하고, 실낱처럼 붙어 있는 긍정을 경박한 태도로 바닥에 내팽개친다. 감정이 고조되어 나의 이성이 술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나도 그러고 있다. 한심하기 그지없다. 이러니 술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
정 술이 고플 때면 혼자서 한두 잔 즐기거나 연인 혹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가볍게 반주한다. 이 외에는 마시지 않는다. 술을 줄이니 좋은 점들이 많다. 예를 들어, 술 사 마실 돈으로 책이나 영양제를 더 구매할 수 있다. 또는 파트너사와 미팅할 때 내가 커피를 여유롭게 대접할 수도 있다. 나아가 몸이 건강해진다. 술자리에 참여할 시간을 운동에 투자하니까 작년보다 근육량은 늘고 지방은 감소했다. 지금으로선 나에게 술을 마셔야 할 명분이 없다. 종국에는 완전히 끊고 싶기도 하다.
나는 친구들한테 이런 말을 했다.
“친구들아, 20대 때처럼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지 말자. 그 대신에 와인 한 잔 즐기거나 대낮에 커피를 마시자. 밤에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자. 아니면 혼자서 차분하게 하루를 정리하는 것도 좋고. 시국으로 삶이 팍팍해서 좋은 사람들과 술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들도 아쉬워할 테니.
대신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우리의 소중한 인생을 투자하자. 술 없어도 사는데 지장 없더라.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몸에 활력이 넘친다. 어차피 큰 도움도 안 되는 데 굳이 찾아가면서 마실 이유가 없다. 이제는 우리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하면서 살자.”
벌써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송년회 이야기가 오간다. 예전 같았으면 괜찮은 식당을 예약하자고 했을 텐데 올해는 다르게 해 볼 예정이다. 햇살 좋은 날 오후에 만나 테라스 있는 카페에 가서 다 함께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것이다. 멀쩡한 정신으로 덕담을 나누면서 말이다. 잊지 못할 추억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