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그리고 운동을 배우는 학생
나와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영어가 재밌다고 말해준다.
어쩌면 그게 영어선생님인 내 앞에서만 하는 눈치 빤한 아이의 빈말이라 할지라도 영어가 좋다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하지만 때로는 영어가 재미없고, 공부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숙제는 내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몇 글자 그냥 끄적거리다 오고, 가끔은 책도 없고, 지각이나 결석도 잦다. 학습이 부진하니 영어 수업 시간이면 자신감이 없어 얼굴이 굳어져 있고, 숙제를 못 한 죄책감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기도 어려워한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달래 보기도 하고, 사소한 행동들을 눈여겨보면서 칭찬도 흠뻑 해주면서 기분 좋게 해 준 후 다음엔 꼭 다해 오기로 약속을 하고 보낸다. 그러나 슬프게도 다음 시간이 돼도 그리 크게 변하는 건 없다. 공부가 싫으니 미루고 미루다 그냥 마지못해 오곤 한다.
빠른 시간 안에 아웃풋을 내서 멋지게 영어 성장을 이루어내고픈 나로서는 이런 아이를 보면 좀 답답함이 들곤 했다.
사실은 공부가 이토록 싫은 아이들처럼 나 또한 너무나 하기 싫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운동"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되니 운동이라는 분야가 이제는 내 삶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필수임을 깨닫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초등학교 때 유일하게 체육에서 수 우 미 양 가 중 '가'를 피하지 못했다. 그 당시 누구나 20점 만점을 받았던 고등학교 체력장 점수에서도 전교에서 유일하게 나만 고작 18점을 받을 정도였으니 체육이나 운동분야에 있어서는 일단 평균이하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건강과 기초체력을 위해서, 나이로 인해 빠져 가는 근 손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해야 했다. 미루기만 하던 중 우연찮은 인연으로 PT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마다 남편과 함께 PT를 받기로 했다. 선생님은 최선을 다해서 세심하게 알려주셨다. 금세 지치고 힘이 빠져서 죽을 거 같이 힘들어하면 붙들고서라도 정해진 횟수를 3회씩 반드시 하도록 도와주셨다.
토요일 이른 오전에 운동만 하고 오면 아침을 먹고 한숨 자야 할 정도로 피곤했다. 다음 날부터 사흘 동안 온몸이 근육통으로 아팠지만, 토요일에 한 번이라도 운동했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함을 느끼며 위안을 삼았다.
선생님은 배운 것들을 집에서 한두 번씩은 꼭 더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하셨지만 나는 그 어떤 운동도 절대 다시 하지 않았다. 모든 운동이 그냥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을 뿐이다.
힘들고 피곤한 토요일이 너무 자주 다가오는 것 같아서 그냥 한두 번씩은 으례껏 핑계를 대고 빠지기도 했다. PT 선생님은 그냥 다 이해하고 받아주셨다. 짧게는 일주일, 결석을 하면 길게는 2주~3주 만에 가서 토요일 한번 PT 수업에서 시키시는 것만 따라 했다.
늘 강조하셨던 코어 운동과 스트레칭을 집에서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면 아차 싶어 선생님 앞에서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숨기기 위해 더 열심을 내려 노력했다.
어느 날 영어 수업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문득 PT에서의 나 같은 학생을 보았다. 열심히 가르쳐놓았는데 집에 가서 책 한번 안 펼쳐보다가 수업 시간 되니깐 잠깐 오고, 툭하면 여행이다 뭐다 빠지고, 아웃풋은 없고 마냥 제자리이다.
배우는 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와야 할 일들에 불성실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조바심도 나고 회의가 느껴지곤 했었다.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다음 달부터는 나오지 말라고 나름 강제 퇴원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PT 선생님은 이렇게 불성실한 나 같은 학생을 싫은 내색 없이 정성을 다해서 알려주고 계셨다.
갑자기 문득 PT 선생님이 나에게 '더 이상은 안 되겠군요 그만합시다' 하면서 나를 포기하시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해주시는데 불성실함과 게으름으로 일관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니 저절로 죄책감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꼭 해야만 하는 당위성 앞에 그냥 하기 싫다는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서 갈등과 부담으로 한동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PT 선생님이 굳은 표정으로 나타나셨다. 나를 계속 지켜봤는데 이젠 좀 얘기를 해야 할 거 같다고 하셨다.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숨이 멎을 거 같았다. 운동 한번 제대로 하지 않다가 수업 때나 잠깐 와서 하고 가는 불량 학생의 자세를 더 이상 보고만 계실 수 없으셨던 게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학생으로서의 게으름과 뺀질거림이 하나하나 날카롭게 지적될 때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단호함과 함께 선생님의 간절함과 안타까움과 호소력이 진심으로 전달되어 뼈아픈 반성이 되었다.
'제가 이렇게 해서라도 00님의 운동을 배우는 태도부터 먼저 좀 바꿔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 갑자기 김홍도의 서당에서 나오는 그림이 펼쳐지고 PT 선생님은 조선시대의 훈장님 같은 모습으로 회초리를 들고 내 앞에 계셨다.
두려움에 떨고 서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잘못에 대한 죗값이 응당 모두 치러져야만 이 팽팽한 긴장감이 모두 풀릴듯했다.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던 내가 꿈속에서 운동을 게을리했다는 잘못으로 선생님께 매를 맞고 있었다. 아앗!! 얼얼한 아픔과 함께 그동안 내면에 눌려있던 양심의 죄책감과 선생님께 대한 죄송함이 모두 해방되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놀라서 잠을 깬 순간 꿈속에서 회초리를 맞은 왼쪽 다리에 쥐가 나면서 뒤틀리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고통으로 한참을 깨어있었다. 두 아이의 만삭 때 빼고는 한 번도 다리에 쥐가 난 적이 없었던 터였다. 다리의 모든 혈관이 꽉 비틀어지는 듯한 통증과 얼얼함이 현실에서 맞은 느낌으로 이삼일 간이나 지속되었다.
'아, 내가 운동을 제대로 안 해서 이제는 다리에 쥐까지 나는가 보구나.' 분명히 꿈이었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했고 한동안 잊을 수 없는 여운으로 남았다.
운동에 대한 강박감과 죄책감이 이토록 나의 양심을 누르고 있었나 싶다.
절묘한 타이밍인지 그날 아침 PT 선생님이 직접 운동하시는 영상이 올라왔다. '어? 이건 뭐지? 선생님, 혹시 저희도 운동 인증 좀 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렇다고 하셨다. 우리 PT 선생님은 부드럽고 따뜻함으로 운동을 참 잘 가르쳐 주신다. 설명도 디테일하고 모든 자세하나 동작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주신다.
선생님과의 PT 때는 칭찬과 격려 덕분에 힘들어도 꾹 참고 3회씩 정해진 횟수를 채우면서 조금씩 운동량을 알차게 채웠다. 그토록 내가 말도 안 듣고 안 하는 숙제까지도 이제는 몸소 먼저 보여주시고 할 수 있도록 권하신다. 생각해 보니 참 감동적인 티칭법이다.
이제는 운동 자체를 배우기도 하지만 학생을 감동시켜서 변화시키려는 선생님의 고단수 티칭법까지 전수받고 싶어진다. 혹시 선생님의 특별한 정성과 친절함이, 학생이 스스로 미안한 마음에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숨은 티칭법일까?
평생을 구두쇠로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살았던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전날밤 꿈 한 번으로 지난날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이야기처럼, 나 또한 이날의 어이없는 꿈 사건 이후 운동에 대한 태도와 각오가 완전히 달라졌다.
꿈속에서 PT 선생님을 만난 그날 이후로 이제, 더 이상 고집스럽게 버티던 염소가 아닌, 정말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매주 수요일마다 헬스장에 가서 선생님께 배운 것들을 기억하며 빠짐없이 운동을 하고, 인증 메시지를 보내드린다.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조금씩 실천하고 있으니 이제야 마음의 안심이 된다. 일 주 한 번이지만 솔직히 내겐 이것이 엄청난 변화의 시작이었다.
한없이 부드럽고 친절함으로 어설픈 우리 부부의 운동을 가르쳐 주시는 PT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가 딱히 살이 빠졌다거나, 눈에 띌만한 신체적인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그 정도로 열심히 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PT 선생님을 만난 후, 운동뿐만 아니라 여러므로 내 삶에 긍정적인 변화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 변화들을 하나씩 에세이로 쓰고 싶어졌다.
PT 선생님의 진정성 있는 티칭이 결국엔 나를 이렇게 감동케 하고 변화시킨 것처럼, 나 또한 우리 아이들에게 정성을 더 쏟아붓는 영어 교육을 하고 싶다. 나 또한 우리 아이들로부터 선생님 때문에 영어가 더 좋아졌어요. 선생님께 감동해서 더 열심히 배울게요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나도 그렇게 티칭에 정성을 다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내가 꿨었던 그 꿈을 모두 한 번씩은 다 꾸고 오면 좋겠다. ^0^
혹시 나도 이때 이 아이의 꿈속에 훈장님처럼 나타났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