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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는가를 묻는 삶

의미를 새기면 행동이 달라진다

by 기록하는최작가

[원문장] <질서 너머>, 조던B.피터슨 저

내가 세계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방식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나와 가족, 그리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어야 한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멈춰 서서 자신에게 물을까.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대부분의 순간,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간다.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해 무심히 흘러가듯, 삶도 그렇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 무심한 흐름 속에도, 마음 깊은 곳엔 작은 소용돌이가 있다.
이유를 찾고 싶어하는, 의미를 갈구하는, 방향을 묻는 그런 물음이다.
같은 일을 해도,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그 일은 전혀 다른 얼굴을 지닌다.
돌을 옮기는 노동일지라도, 한 사람은 그것을 '단순한 고역'이라 말하고, 다른 이는 '사원을 세우는 거룩한 일'이라 말한다.

이처럼 의미는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삶의 질감을 완전히 뒤바꾼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그저 반복되는 노동 같을 때, 그 일에 의미를 새긴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무의미한 수고가 아니다.
의미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방향을 만든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무언가를 하며, 그 모든 행동에 이유를 찾고 의미를 새기는 일을 얼마나 자주 하는가.
되돌아보면, 거의 없다.
대부분의 행동은 본능에 가깝다.
습관처럼 몸에 밴 일들, 사람들의 시선에 반응하는 말들, 나도 모르게 끌리는 충동들이 더 많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멈추고 바라보는 일이다.
바라본다는 건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이다.
그리고 고민은 언제나 피로를 동반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피곤함을 피하려 한다.
생존을 위해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한 단순한 길을 택한다.

그래서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냥 한다. 그냥 산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이 있다.
삶에서 몇 번의 갈림길이 있고, 몇 번의 고요한 밤이 있고, 몇 번의 선택의 시간이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냥' 해서는 안 된다.
그때는 피곤함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미를 찾고, 이유를 묻고, 마음의 소리를 귀 기울여야 한다.

중요한 행동 앞에서는 잠시 멈추자.
그 일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왜 그것을 하려는지, 내 안의 어떤 마음이 그것을 이끌고 있는지를 바라보자.
그리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다면, 그 일은 단단해진다.
흔들리지 않는 무게를 가진다.
남들이 뭐라 하든, 방향이 흔들리든, 그 일은 내 안에 뿌리 내리고 자란다.
그런 일은 지치더라도 다시 시작하게 만든다.
멈추더라도 다시 걷게 만든다.

물론 모든 행동에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모든 숨에 의미를 새기려 한다면 숨 쉬는 일조차 버거워질 것이다.
다만, 중요한 일들, 내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삶의 방향을 좌우할 일들만큼은 이유를 묻자.

의미를 묻는 일은 귀찮고 피곤하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삶은 쉽게 부서진다.
가벼운 바람에도 휘청이고, 작은 시련에도 흔들린다.
그러니 가끔은, 두 눈을 감고 마음속에 조용히 묻자.
“나는 왜 이것을 하려는가.”
그 한 문장이, 삶을 더 깊게 만든다.
그리고 그 깊이만큼, 우리는 더욱 단단한 사람이 된다.
그 깊이 속에서 길을 찾자.
의미를 새긴 사람만이, 삶을 향해 단단히 걸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어떤 이유로 오늘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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