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관대함을 가장한 회피에 익숙하다
사람은 본래 자신에게 너그럽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관대함을 가장한 회피에 익숙하다. 해야 할 일이 앞에 놓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 일’이라기보다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일’, 혹은 ‘무언가 이상이 있는 일’처럼 둔갑시킨다. 명확하고 단순한 책임을 불투명하게 흐려놓는 것이다. 이유를 만들어내는 데 우리는 꽤나 능숙하다. 몸이 좀 피곤하다거나, 마음이 흐트러졌거나, 환경이 여의치 않다거나. 그렇게 핑곗거리를 조심스럽게 포장지처럼 덧댄다. 그래야 마음 한켠에서 고개를 드는 죄책감을 눌러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 위에 덧칠된다. 우리는 그것을 ‘흘러간다’고 표현하지만, 실은 ‘흘려보낸다’가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의도적으로 잊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일은 마치 나와 아무 상관없었던 것처럼 멀어진다. 나는 그것을 놓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진실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후회는 묘한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예고 없이, 아주 사소한 순간에 스며든다. 길을 걷다 문득,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혹은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오래된 음악에 실려. 그때 비로소 미뤄둔 일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단 한 번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된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건 자유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선택이고, 그 선택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일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책임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유와 책임은 서로의 그림자다. 빛을 택한 순간, 그림자는 반드시 따라온다.
하지 않은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말도 없고, 소리도 없지만, 그것은 내 안에서 자라난다. 침묵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어느 날 내 앞에 단단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때 나는 안다. 미뤘던 것은 단지 시간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관대하다는 건, 때때로 무책임의 다른 이름이 된다. 우리 모두 그 관대함 속에서 자주 스스로를 속인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날들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