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이미지 : 세은이가 다닌 Shenendehowa School District의 Arongen 초등학교. 사진의 왼쪽엔 교실들이, 오른쪽 건물엔 강당과 체육관 등이 있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낯선 것들을 일상으로 만드는데 필요한 것들
스쿨버스 정류장 그리고 스몰 토크
보스턴 여행 다녀온 후 다음 주 수요일부터 세은이의 4학년 정규학기, 진짜 학기가 시작되었다.
방학중엔 학교 가는 아이들이 많지 않으니 버스가 우리 집 앞까지 올 수 있었지만, 개학하고 나서는 집에서 5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학교에서 온 통신문을 보면, 학년별로 아이가 정류장까지 걸어야 하는 최대 거리는 규정으로 정해져 있어서 버스 때문에 멀리까지 걷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12세 미만은 혼자서 버스를 타거나 학교에 등교할 수 없고 반드시 부모가 직접 인계해야 한다.
집에 올 때도 버스 정류장에 부모가 없으면 아이를 내려주지 않고 다시 학교로 데려간다고 되어있다. 버스 시간에 맞춰서 정류장에 가는 게 아내와 나에겐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뉴욕주 법에는 12세 미만 아동은 혼자 외출할 수 없게 되어있고 심지어 공중 화장실조차도 16세 이상의 누군가가 반드시 동행하도록 정해 놓았다. (미성년 보호자는 한 번에 돌볼 수 있는 아동의 숫자가 제한된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 한 명에게는 초등학생 여러 명을 동시에 보도록 할 수가 없다.)
영화 "나 홀로 집에"같은 일이 요즘 세상에 벌어진다면 부모는 아동학대로 처벌받는다. 절대 조심.
개학 첫날 아침 7시 30분, 학교에서 정해준 정류장 위치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아이가 엄마랑 버스를 타러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직장 때문에 한국에서 두 달 전에 이사 왔고 여기서 2년 동안 살 건데 아이는 4학년 얘 하나예요."
동네 이웃들 만날 때마다 여러 번 얘기해서 이 정도 자기소개 버벅거리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우리 집이 있는 코트 바깥쪽 아랫 길에 살고 있는 1학년 꼬마 Lewis(루이스)와 엄마 Kacie(캐시)라고 했다..
Lewis네는 1년 전에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이사 왔고 아이는 Lewis랑 동생 Nick(닉)이 있다고 했다.
Kacie는 자기들도 이사 온 지 오래된 건 아니어서 아직도 동네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짧게 만나면서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학교버스 기다리면서 동네 사람들과 하게 되는 "스몰 토크 (Small Talk)"는 전형적인 미국 문화다.
세은이를 학교 보내기 전에 인터넷 한인 커뮤니티 여러 곳의 글을 봤었는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이런 문화가 익숙하지 않고 심지어 너무 부담돼서 아예 아이를 자기 차로 데려다준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급적 어울려 지내고 싶고 엄마 Kacie나 아빠 Rick(릭)도 항상 밝은 표정으로 인사해 주었기 때문에 피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짧게 나눌 만한 이야기를 집에서 미리 준비해서 나가기도 했다. 날씨 이야기, 주말 계획, 학교나 동네 소식 등등.
아내와 내가 노력한 것도 있지만 Kacie와 Rick이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스쿨버스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시간은 아니게 되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게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우리 상황에서는 세은이가 스쿨버스 타고 다니는데 문제가 없어야만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내가 매일 재택근무를 하니까 차 한 대로도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조만간 재택근무가 끝나게 되면, 내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만약 아내나 세은이가 그때까지도 스쿨버스 문화에 적응이 되어있지 않는다면, 고민의 여지도 없이 차를 한대 더 사야 하고 아내가 학교를 매일 오고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비용 때문에라도 가급적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필요했다. 다행히도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고 있었고 Lewis네 가족을 매일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다.
(왼쪽) 세은이와 Lewis가 아침에 함께 타고 가는 스쿨버스. (오른쪽) 오후에 하교하는 세은이와 버스기사 Mrs. Susan.
학교 담임 선생님 Mrs. Miller 그리고 동네 친구 Madison
개학하고 나서 꽤 시간이 흐르도록, 세은이가 가진 영어 실력에 비해 이상하게도(?) 학교생활이 순조로웠다.
세은이는 학교 이야기를 잘해주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개학 이후 얼마간은 엄마 아빠를 위해 일과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는 아내와 나는 세은이의 얘기만으로 미국 학교 생활을 상상해야만 했다.
브라질에서 온 친구랑 둘이서 아침마다 ENL 선생님 Mr. Sweet을 만나는 것, 한 반에 25명 정도라는 것, 수업 시간 중에 아무 때나 화장실에 가도 된다는 것, 쉬는 시간은 따로 없고 점심 후에 학교 뒷마당에서 놀이 시간(Recess time)이 있다는 것 등등.
수업 시간엔 학교에서 나눠준 크롬북(Chrome Book)이라고 하는 노트북 PC를 사용하고 그 덕분에 선생님 및 친구들과의 소통을 구글 번역기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뉴욕에선 코비드 지원의 일환으로 한시적으로 급식비를 무료로 해주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세은이는 급식의 양이 너무 적고 조리 음식도 거의 없는 데다가 심지어 맛도 없다고 매번 불평하고 도시락을 싸달라고 했었다.
사실 아이가 원하면 얼마든지 도시락을 싸서 보낼 수는 있다.(단, 알레르기 음식, 유리 용기는 안전상 가져올 수 없음)
하지만 우리는 돈 때문만이 아니라 세은이가 반 친구들이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고 같은 경험을 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몇 달만 참고 먹어보라고 설득에 설득을 했다.
세은이는 집에 오면 늘 배고프다 했기 때문에 학교 끝날 때마다 좋아하는 간식거리를 항상 준비해야 했다.
언젠가 하루는 학교 끝나고 나서 세은이가 아직 집에 오기 전에 Mrs. Miller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세은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말을 하지 않고 화가 난 채로 집으로 갔다면서 얘기해 보고 이유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좀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올 것이 왔다 싶었고, 일단 아내가 정류장에 가서 세은이를 데려왔다.
세은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에 왔는데, 방으로 따로 불러서 방금 받은 메일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의외로 순순히 모든 것을 털어놓은 세은이의 말에 의하면,
오늘 놀이시간엔 학교 뒷마당에서 놀았고, 놀이터에 있는 그네는 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아서 정해진 순서대로 타게 되어 있다고 한다. 자기는 순서가 아니어서 그네에 타려고 하지 않고 그냥 주변에 서 있기만 했는데 순서를 안 지킨다고 지적을 받아서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그러고도 선생님이 뭐라고 뭐라고 자기한테 말을 하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뭘 할 때마다 자꾸 혼내는 것 같아서 그냥 아무 대꾸도 안 했다는 게 세은이의 설명이었다.
그러더니 울면서 친구들이랑 말이 잘 안 통하니 자기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외롭다고...
그동안 학교생활이 순조로워 보였던 건 세은이가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기 때문에 그랬나 보다. 역시 그냥 저절로 되는 건 없다.
세은이의 말을 다 듣고 얘기를 한참 나누고, 나는 선생님께 곧바로 이메일을 적었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는 자기 일을 스스로 잘해 냈던 평범한 아이였지만 이곳에 와서는 특별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되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아빠였다.
이곳에서는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어쩔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이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말해줘야 했다.
"오늘 세은이가 선생님께 공손하게 대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내일 등교하여 선생님께 직접 사과하도록 지도하였습니다.
세은이가 아직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니 이곳 아이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고, 자기 딴엔 옳게 했다고 생각한 일들이 선생님의 지도 방향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세은이의 성품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아이의 소통 능력을 볼 때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드리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가정에서 꾸준하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세은이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학부모인 제 아내와 저 역시 미국 학교 경험이 전무하여 생소한 것이 많고 주변의 도움이 절실한 상태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메일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다면 제게 편하게 연락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가정에서 충분히 지도하여 학교로 보내겠습니다."
Mrs. Miller는 곧바로 답장을 주셨는데, 단지 아이의 생각이 궁금했고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다면서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고도 했다.
짧은 답장이었지만 선생님 본인도 세 아이 엄마여서 그런지 세은이를 배려하고 이해해 주려는 것이 느껴졌다.
한국에선 선생님과 학부모가 직접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 여기선 아이한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 연락해서 학교와 가정에서 함께 해결하도록 하고 있었다.
세은이는, 이날 이후에 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여자아이 Madison (매디슨)에게 세은이의 학교 적응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살고 있는 Madison은 함께 버스로 등교하고 교실에서 세은이가 학교 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세은이를 통해 전달받은 Madison 엄마 전화번호로 감사의 문자를 했다. 우리는 두 아이가 좋은 친구가 되기를 바랐다.
그 이후 학교 상담 이야기 : 미국 초등학교 학부모 상담
상담이후 학교와 소통하는 이야기 : 미국 학교로 보내는 가족 여행기
(왼쪽) 우리집에 찾아 온 "다랭이" (민달팽이). (가운데) 뉴욕에서 사용하는 전기계량기. (오른쪽) 와플기계로 만든 누룽지. 평소에 잔뜩 만들어서 여행갈 때 먹었다.
점점 익숙해지는 우리 동네의 일상
여름철 우리 집 뒷마당에는 밤마다 반딧불이 가득했다. 책에서만 보던 것들이 바로 눈앞에 매일 현실로 펼쳐지니 참으로 신기했다. 작은 반딧불이 사진으로는 담기지 않아서 참 아쉬운 광경이다.
까마귀, 토끼, 청설모는 어딜 가나 흔하게 보여서 더 이상 사진 찍지 않게 되었고, 집 뒷마당에 가끔 칠면조, 딱따구리, 라쿤, 사슴, 여우까지 나타나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온날 부엌 창문에 달팽이 한 마리가 붙어있었는데, 세은이가 "다랭이"라고 이름 짓고 집으로 데려와 먹이도 주면서 한동안 길렀었다.
슬프게도 몇 주 뒤에 다랭이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뒷마당에 묻어주고 장례식도 치러주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단수, 정전, 인터넷 끊김 같은 것도 대비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단전, 단수라는 말을 들어본 지 거의 30년은 되는 터라, 이사 와서 처음으로 정전을 당했을 때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고 우리 집에 뭔가 큰 문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밖에 나가보니 동네 사람들이 별일 아닌 듯 마당에서 운동하고 개를 데리고 산책 다니는 모습을 보고 나서 황당해했던 기억이 있다.
정전을 몇 번 당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날씨가 좋지 않아 보일 때마다 전기회사 홈페이지에서 정전 예상지역을 검색해서 미리미리 대비하기도 했다.
전기 사용요금은 매달 내야 했지만 실제 계량기 검침은 두 달에 한 번만 한다.
검침하지 않은 달은 예상치를 내고 실제 검침한 달에는 전월에 낸 예상치와 실제 사용 금액 간의 차액을 보상하여 부과하는 형태로 요금제가 운영된다. (Actual, Estimated로 구분됨)
좀 황당한 방식이지만 넓은 지역을 매달 누군가 검침 다니는 것도 큰 일이겠다 생각하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수도요금은 6개월에 한 번 낸다.)
우리는 가스/전기/수도 모두 합해 한 달 평균 $220 정도였는데 요금 체계나 납부 일정이 지역별로 또 서비스 회사별로 제각각이다 보니 챙겨서 확인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내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며 끈기 있게 기록하고 추적해서 월별 지출파악이 가능하게 했다. 정말 굳은 마음을 먹고 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옆집 Gavin네와는 볼 때마다 인사하고 종종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간식거리를 주고받았다.
근처 농장에 블루베리 따기 체험을 다녀왔다며 우리에게도 한 바구니 나눠주기도 했고 우리도 한인마트에서 산 한국 아이스크림이나 어린이 음료 같은 것들을 나눠주었다.
때때로 동네 사람들이 쉽게 접해보지 못했을 한국 간식, 그중에서도 너무 자극적이지 않은 것들을 가끔 나눠주며 지냈다.
이웃들이 답례로 보내준 쿠키, 파이 같은 것들과 텃밭 채소 등이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
특별하게 느껴졌던 여러 가지 들이 우리의 일상으로 녹아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가질 수 있었다.
(왼쪽) 집 관리를 도와주는 Tim과 그의 고양이 Alvin. Alvin은 아침마다 우리 집으로 산책을 왔었다. (오른쪽) 다랭이의 장례식. 좋아하던 상추와 함께 뒷마당에 묻혔다. (사진)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요.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