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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Feb 19. 2024

진짜 나를 발견하는 여정의 시작


엄마가 말라갔다. 식욕이 없다고 했다. 몸무게가 10kg 이상 빠졌다. 6개월 동안 일어난 일이다. 그런 적이 없었다. 제발 병원 좀 가보라고 소리쳤다. 무섭단다. 뭐가 나올지 몰라 두렵단다. 그게 뭔 소리냐고 또 소리쳤다. 미련한 엄마. 갱년기라 잠시 그런 거라며 얼버무린다. 병신 같은 나. 억지로 끌고서라도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오전 8시 30분. 자전거에 몸을 실어 페달을 밟는다. 15분이면 도착하는 회사. 이렇게 감사할 때가. 오전 9시. 회의가 시작된다. 오전 10시. 팀 조회를 마치고 오픈 준비를 한다. 오전 10시 30분. 고객들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다. 자본주의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면서.     


오후 7시. 또 회의다. 하루에 다섯 번까지 하는 날도 있다. 회의 때문에 회의를 느끼는 직장인. 오늘 팀별 매출 목표, 예상 마감 실적, 달성률 향상 방안, 내일 대안 등등. 햄스터 쳇바퀴처럼 답변 돌려 막기를 시전한다. 어차피 회사가 듣고 싶어 하는 답변은 정해져 있으니까. 절반은, 아니 그 이상이 뻥일 수도 있는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오후 10시. 마감 음악이 흘러나온다. 다시 자본주의 미소로 고객들을 배웅한다. 행사가 바뀌는 날이다. 행사장으로 간다. 업체들의 위치를 잡아주고 오와 열을 맞춰 매대와 행거를 정돈한다. 현수막을 달고 포스터, 가격표가 제대로 나왔는지 확인한다. 젠장, 숫자 하나가 틀렸다. 내일 아침에 빨리 와서 조치해야 한다. 오후 11시 30분. 재킷 안 셔츠가 축축하다. 구두 안 양말이 열기를 뿜어낸다.     


자전거에 몸을 싣는다. 15분이면 집에 갈 수 있지만 핸들을 튼다. 개천을 따라 난 길로 달린다. 경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앞서가는 자전거를 제쳐야 속이 후련하다. 오전 0시. 한강이 보인다. 다른 세상에 도착하자 배우 이병헌 못지않은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한강 야경을 배경으로 중형 세단을 타고 퇴근하는 드라마 속 직장인이 뭐 별거냐. 더 있고 싶지만, 중형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한강 야경을 배경으로 세상 아름다운 퇴근이다.     


오전 1시. 엄마와 둘이 사는 월셋집. 엄마는 깨어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과일을 내놓는다. 엄마는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병원에 좀 가보라고 하고 싶지만, 엄마의 황소고집은 꺾을 수 없다. 피곤하다. 녹초가 된 채로 침대에 몸을 묻는다. 불현듯 아까 행사 가격표 오타가 떠올랐다. 젠장! 알람을 맞춘다. 오전 6시 30분으로.    


대기업의 연중무휴 백화점에 다니는 직장인.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 그러나 하루에 엄마와 마주 앉아 식사 한 끼를 못한다. 주말이 피크인 백화점 특성상 휴무일도 일정치 않다. 아들의 건강을 위해 유기농 재료로만 요리를 하는 엄마. 정작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 하루에 한 끼라도 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한 끼라도.     


어느 날 엄마가 병원에 가야겠단다. 소변에서 피가 나왔다는 것이다. 바쁜 아들 방해하기 싫다며 혼자 병원에 다녀온 엄마. 별거 아니라며 웃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맞다, 그 미소였다. 백화점에서 내가 매일 연습했던 미소. 집요한 추궁에 결국 엄마는 난소암 초기 판정을 받았단다. 요즘 암은 암도 아니라고 말하는 엄마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늘 그랬듯이 잘 이겨낼 거니까. 언제나 슈퍼우먼이었으니까.    

 

엄마가 죽었다. 6개월 만이었다. 난소암은 초기라도 난치병이란다. 초반에 의료 사고도 있었지만, 엄마는 항암 치료까지 잘 마쳤다. 건강을 회복하는 듯 보였다. 역시 슈퍼우먼이었다. 그러나 패혈증이 슈퍼우먼을 집어삼켰다.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야, 엄마는 죽지 않아. 그래, 설사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거야. 임종 때 엄마의 두 눈은 분명 천국을 바라보고 있었을 테니까.


엄마는 평상시에도 유언 같은 말을 종종 했다. 당신이 죽으면 천국 잔치가 열리는 것이니 장례식이 즐거웠으면 좋겠단다. 찬송가를 틀어놓고 문상객에게 기쁘게 맛난 음식을 대접했으면 좋겠단다. 죽은 뒤에 잘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니 살아있을 때 잘하란다. 엄마가 말한 그대로 장례를 치렀다. 엄마 장례식에서 이렇게 밥 잘 먹는 상주는 처음 본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배가 고팠고 음식은 맛있었다.    

 

한 줌의 재가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엄마는 치아만 빼고 따듯한 가루가 되었다. 엄마의 죽음보다 장례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장례식이 끝났다. 그동안 못 잔 잠을 몰아서 잤다.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자 겨울의 매서움이 뼛속을 파고 들었다. 이상하다. 한 겨울인데 왜 더위를 먹은 거지. 몽환적인 시간이 계속되었다. 무기력과 두통의 반복. 삶의 균형 감각이 무너져내렸다.     


왜 살아야 하지. 무엇을 위해 하루 14시간씩 일했을까. 유체이탈을 한 듯 일하는 육체와 질문하는 영혼이 분리되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동안 삶의 목표가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에 있었구나. 목표를 잃어버린 삶.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살아야 할까. 무엇을 원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진짜 누구일까.'


그렇게 시작된 서른 춘기는 사춘기보다도 맹렬하게 나를 집어삼켰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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