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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r 04. 2024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결혼


고향을 떠났다. 25년 동안 살았던 서울 송파.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모든 학창 시절은 물론, 20대의 청춘을 보낸 곳. 켜켜이 쌓인 엄마와의 추억은 말해 뭐 하랴. 빈자리가 점점 더 커지면 어떡하지. 엄마의 흔적을 얼른 지워버려야 했다.


아기 코끼리를 줄에 묶어놓으면 장성했을 때 줄이 없어도 그 자리를 맴돈다고 한다. 나는 코끼리도 아니면서 이사 후보지로 알아본다는 곳들이 판교, 성수 등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를 넘지 못했다.(당시에는 지금처럼 비싸지 않은 동네였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 하. 하!)


회사에서 발령으로 근무지를 신촌 본사로 옮겼다. 마침 건물이 없어 유랑하는 교회도 증산동으로 이사를 했다. 삶의 터전이 서울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마침내 보이지 않는 줄을 끊고 나는 고향 반대편으로 떠났다. 상암동에 7평 남짓한 풀옵션 오피스텔을 구하니 가져갈 짐이 없었다. 잘 됐다. 엄마의 흔적들을 모두 버리고 가자.


강제 독립을 이루고 한두 달 지났을까. 30대 초반에 나는 로망을 이루었다. 한강 야경이 보이는 고급 오피스텔에 사는 것도 중형 세단을 타는 잘나가는 샐러리맨도 아니었지만, 나만의 공간이 있었고 작은 중고차도 생겼다. 로망이 뭐 별거냐. 한강 야경이야 창문에 블라인드 치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고 중형 세단이나 소형 중고차나 운전할 수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큰 덩치가 7평짜리 원룸을 꽉 채워서 그랬는지 엄마의 빈자리가 잠시 사라졌다. 게다가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삶의 목표 또한 사라졌으니까. 보상 심리였는지 봉인 해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싱글 라이프의 호사를 누려보기로 했다. 한창 요리하는 섹시한 남자가 대세인데 나라고 '요섹남'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스테이크와 함께 와인을 음미하며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빙의되기도 했다.


축구 동호회에도 가입해 좋아하는 축구를 마음껏 즐겼다. 오피스텔 헬스장과 카페를 오가며 주말의 여유를 누려보기도 했다. 심심하면 괜히 차를 몰고 한강 야경을 즐기며 쇼핑몰로 향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나 혼자 사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이렇게 완벽한 삶이 있었을까. 이게 바로 싱글 라이프의 행복이구나!


오피스텔로 이사한 지 6개월이 흘렀다. 몸무게가 5kg이나 불었다. 삶의 패턴이 불규칙하고 무절제하게 바뀐 결과였다. 분명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고 했는데. 다이어트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이미 편해진 삶의 방식에 길들여져 쉽지 않았다. '이러다 나 결혼도 못 하고 뚱땡이 홀아비로 죽는 거 아닐까.' 싱글 라이프를 찬양하며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여겼던 내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우리는 불편할 때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편하면 살밖에 더 찌겠어요?



담임 목사님은 설교 때 이런 유의 말을 반복했다. 나를 저격한 건가 싶은 촌철살인에 가슴이 철렁, 뱃살은 출렁! 이제 조금 삶이 편해진 것 같은데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고? 불편해야 한다는 불편한 말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저녁이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며 대형 마트로 향하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다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결혼은 성숙을 위함이지, 행복을 위함이 아닙니다.
성숙을 추구할 때 행복해지고, 행복을 추구할 때 불행해지는 것이 결혼입니다.



어떤 연사가 결혼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고 결혼도 행복하기 위해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이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성숙을 위한 결혼이라. 갑자기 불편한 진실이 떠올랐다. 맞다. 담임 목사님이 강조했던 그것이다. '우리는 불편할 때 성숙해진다고 했는데 성숙을 위한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불편해지기 위해 하는 것이네?' 두개골에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이때부터 '불편'과 '성숙'이라는 두 단어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나는 지금이 너무 편하고 좋은데 이 상황에서 내게 가장 불편한 것은 뭘까?' 그러자 불현듯 스쳐간 생각. 바로 '결혼'이었다. '혹시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걸까?' 결혼이 미친 짓이라면 내 생각은 미친 것이었다. 머리를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도 이미 결혼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담임 목사님의 설교와 라디오 연사의 강의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이 미친 생각이 이상하리만치 마지막 퍼즐 한 조각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 나는 불편하기 위해서 결혼했다. 그전까지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배우자가 필요한지 탐색했던 이기적인 시간을 보냈다. 좋은 배우자를 원했지만, 나 자신이 먼저 좋은 배우자의 자격이 있는지 살펴보지 않았다. 하지만 불편하기로 결단하고 아내를 만났을 때는 달랐다. 내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려면 어떤 배우자가 될지 고민했다. 상대의 조건이 아닌 나의 성숙에 초점을 맞추려고 애썼다. 그러자 내 부족함이 보였다. 환상을 좇는 눈에서 진실을 보는 눈으로 변화되어 갔다.


아내는 결혼 전에 내가 살던 7평짜리 원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화려한 결혼식도, 심지어 웨딩드레스도 필요 없다고 했다. 겉치레가 아닌 내실을 다져가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돈이 있어야 결혼하는 게 아니라 꿈이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조적 결손가정에서 자란 나와 심리적 결손가정에서 자란 아내는 서로에게 좋은 배우자가 되는 꿈을 그리며 화목한 가정을 꿈꾸었다.


이제 어느덧 결혼 9년 차다. 결혼은 정말 미친 짓이 맞다.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앞서면 부부 둘 다 미쳐버린다. 그러나 배우자의 행복을 위해 내가 불편함을 추구하면 부부 둘 다 미치게 행복해진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혼은 미(狂)친 짓이 될 수도, 더없이 미(美)친 짓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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