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학기 반장 Mar 22. 2024

할머니는 왜 배가 터지도록 계속 밥을 주실까?


"할머니, 제발 조금만 주세요."
"잘 먹어야 공부도 잘하고 튼튼해지지."
"흐억! 다 못 먹어요. 너무 많아요, 할머니."
"아이고 내 새끼. 밥 많이 있어. 먹고 더 먹어."


덜먹으려는 손주와 더 먹이려는 할머니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하지만 언제나 최후의 승자는 할머니다. 손주는 배 터지기 바로 직전까지 먹어야만 할머니를 멈출 수 있다. 전국 모든 할머니의 국룰이다.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지독한 사랑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무한리필의 원조가 바로 할머니가 차려주는 손주의 밥상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과식하면 체하기 마련이다. 음식을 먹는 목적이 튼튼해지는 것이라면 많이 먹는 것보다 골고루 적당히 먹는 게 좋다. 사랑도 지나치면 오히려 상대를 병들게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건강 이론을 설파한다. 건강을 잃고 나니 후회가 된다고 한다. 맨발 걷기를 해라, 제조기로 두유를 만들어 먹어라, 하루에 생마늘 몇 개를 꼭 먹어라 등등 한두 달도 안 되어 계속 다른 주문을 한다. 나는 건강한데 병자 취급 당하는 느낌이다. 물론 아버지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강요하기 전에 아버지가 뭐 하나라도 최소 1년 이상 꾸준히 해서 효과를 보길 바랄 뿐이다.


© kellysikkema, 출처 Unsplash


나는 성인이 되어 어린 시절의 결핍과 직면했다. 결핍을 해결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전문가의 도움도 받았다. 그렇게 결핍이 채워지던 순간,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앞으로 어린 시절에 결핍을 경험한 이들을 만나면 꼭 내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택시를 타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어떤 길로 가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원하는 목적지에 잘 도착하면 택시비를 내고 내린다. 그런데 만일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지도 않았는데 택시가 출발한다면, 내가 모르는 길로 마구 달린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최근 코칭을 배우며 알게 된 내용이다.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잘 도착하도록 동행하는 자는 '코치'다. 이에 반해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은 '납치'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코치가 되려고 한 걸까, 납치를 하려고 한 걸까.


코칭의 핵심은 납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안에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가 넘쳐나더라도 상대가 원하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참지 못한다면 꼰대라는 칭호를 얻게 될 테니까. 밥솥에 맛있는 밥이 한가득 있어도 먹기 싫다는 사람에게 퍼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고문이다.


© kaip, 출처 Unsplash  


어느 동화 마을에서 소와 사자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소는 사랑하는 사자를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 이슬이 맺혀있는 신선한 풀을 갖다주었다. 사자는 사랑하는 소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싱싱한 고기를 사냥해서 갖다주었다. 그 둘은 점점 말라갔다. 결국 헤어지기로 결심한 그들은 서로에게 말했다. "난 최선을 다했어!"


톨스토이의 우화 '소와 사자의 사랑 이야기'의 내용이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미명 아래 자기만족이라는 이기심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할머니의 목적이 손주의 배를 터뜨리려는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목적이 아들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먼저 상대에게 질문해야 한다. 무엇을 언제 어떻게 원하는지 말이다.


또 물어보기 전에 상대가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 기다림이란 그 자리를 지켜내며 함께 존재함이다. 말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다. 납치범에게 내 마음을 맡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학기 반장 연재]

월 : 이학기 스쿨의 월요일 진로반
화 : 이학기 스쿨의 화요일 독서반
수 : 이학기 스쿨의 수요일 작가반
목 : 이학기 스쿨의 목요일 직장반
금 : 이학기 스쿨의 금요일 고민반
이전 05화 글쓰기, 어떻게 해야 두렵지 않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