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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Apr 02. 2024

천재가 만든 백치, 백치가 만든 천재

도스토옙스키, <백치>


천국에 가면 입국 심사를 한다. 나라별로 줄을 서는데 유독 한 나라만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인지 아는가? 바로 한국이다. 성형을 많이 해서 원판과 대조하느라 천사들이 애를 많이 먹는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들은 우스갯소리다. 로션 바르는 게 귀찮아 물만 찍어 발랐던 내가 요즘은 선크림까지 꼬박꼬박 바르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      


얼마 전 웹드라마 <마스크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마스크를 쓴 스트리머인 주인공의 이중생활이 우리의 공감대를 자극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상업성에 기반한 미의 기준을 좇아 가면을 쓰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길 바라면서 동시에 열심히 화장하고 고치는 이중성을 보인다. 화려한 상업성이 판치는 세상에 꾸밈없는 순수성은 어딘가 불편하고 모자라게 느껴진다.    

 


'마스크걸' 포스터, 웹툰 '마스크걸'. 제공| 넷플릭스, 네이버 웹툰출처 : SPOTV NEWS(https://www.spotvnews.co.kr)



크림 전쟁에서 패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러시아는 1861년에 농노제를 폐지한다. 허울뿐이긴 했지만, 사회적으로 큰 변혁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자본주의를 숭배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쓰인 <백치>는 로고진, 예판친, 가냐, 토츠키 등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실상을 까발린다. 나스타시야가 한낱 상품으로 취급받고, 그녀도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는 모습을 보며 므이쉬킨은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아글라야에게 연정을 품는다.      


연정 대신 연민을 택한 므이쉬킨은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동정심 때문에, 그리고 그 여자의 만족 때문에, 고귀하고 순결한 다른 아가씨를 모욕해도 괜찮았고, 그 교만하고도 증오에 불타는 눈앞에서 그녀에게 굴욕을 안겨줘도 괜찮았단 말입니까?”(<백치2>, 473쪽)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므이쉬킨을 통해 진실로 아름다운 인간을 묘사하고자 애썼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자신의 신념 때문에 배려 따위는 하지도 않는 이런 인간이 아름답다고? 게다가 므이쉬킨은 나스타시야를 구하지도 못했고 그 자신은 진짜로 백치가 되어버렸으니 이 인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가장 무서운 고통 속에서조차 그리스도가 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게끔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로고진의 집에 있는 그림에서는 아름다움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중략) 그 대신 이 얼굴은 눈곱만큼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가차 없이 묘사되었다. 여기엔 오직 자연이 있을 뿐이며, 누구든 그러한 고통을 겪은 인간의 시신이라면 진실로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다.”

- 도스토옙스키, <백치2>, 문학동네, 159~160쪽


도스토옙스키는 한스 홀바인의 그림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을 보면서 그 자리에 몇 시간 동안 얼어붙었다고 한다. 극사실주의의 솔직함과 순수성에 매료된 그는 <백치>를 집필했고 므이쉬킨 공작을 만들어냈다. 그림 속 그리스도처럼 소설 속 므이쉬킨은 날것 그대로 백치 같은 모습이다. 답답하고 무기력하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므이쉬킨은 그리스도와 닮았다.    

 


한스 홀바인, '무덤 속 예수의 시신(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1作)', 스위스 바젤공립미술관 소장



사람들이 침 뱉고 조롱하며 채찍질했던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십자가로 묵묵히 걸어갔다. 므이쉬킨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에게 백치라는 소리를 들으며 멸시받지만, 나스타시야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행을 택한다. 진실은 이렇게 불편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홀바인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비참한 얼굴 못지않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신체 부위가 있다. 그것은 못 자국이 선명한 손등을 따라 곧게 펴진 가운뎃손가락이다. 홀바인은 진리조차 자기 입맛에 맞게 가공하여 종교 권력으로 남용하는 자들을 엿 먹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순수한 자를 백치로 치부하는 화려한 자들에게 누가 진짜 백치인지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부활절 전후로 <백치>를 읽으니 그리스도를 닮은 므이쉬킨의 백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므이쉬킨을 보며 끝까지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만을 좇다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뫼르소가 떠오른다. 아글라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므이쉬킨이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들은 최고의 찬사는 그가 왜 영원한 백치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 준다. 


나는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가장 진실한 사람이고,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백치2>, 196쪽)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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