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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기 반장 Mar 26. 2024

쥐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한 남자의 죄

조지 오웰, <1984>


줄리아한테 하세요! 줄리아한테! 제게 하지 말고 줄리아한테 하세요!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도, 살갗을 벗겨 뼈를 발라내도 말예요. 저는 안 돼요! 줄리아한테 하세요! 저는 안 됩니다!
- 조지 오웰, <1984> (민음사) 중에서



윈스턴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나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나를 더욱 약하게 만든다'가 된다.


독재자 빅 브라더에게 저항의식을 품었던 윈스턴은 내부 당원 오브라이언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갖은 고문으로 처참히 짓밟히던 윈스턴은 그의 모든 고통을 손에 쥔 오브라이언에게 점차 애정을 느끼는 지경에 이른다.  


고통의 절정은 쥐가 든 상자가 윈스턴 머리에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윈스턴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 인간의 속마음만큼은 그 누구도 절대 지배할 수 없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러나 그는 쥐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하고 만다.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자기만 살겠다고 절규하는 그를 보며 나는 깊은 패배감을 느꼈다.


"물론 우리 평생에 어떤 것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나 여기저기서 일어날 소규모의 저항 운동은 상상할 수 있어. 만약 그 세력이 점점 불어나서 후세에 몇 마디의 기록이라도 남기게 된다면, 우리가 떠난 뒤에라도 다음 세대가 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거야."
- 조지 오웰, <1984> (민음사) 중에서


윈스턴이 말했듯이 전체주의에 잠식되지 않는 개인의 저항의식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잔혹함에 개인의 저항의식은 완전히 산화되어 버렸다. 나는 인간 존재의 처절한 무력감에 전율했다. 쥐 앞에 굴복한 윈스턴은 오브라이언에게 순종하게 되었고 마침내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인간의 마지막 희망을 좌절시킨 주체가 왜 하필 쥐였을까? 나는 쥐가 상징하는 것이 '죄'라고 보았다. 쥐와 죄는 인간을 병들게 하고 주변을 오염시킨다. 14세기 중기 전 유럽을 잠식했던 페스트의 주요 감염원은 쥐였다. 흑사병이라고도 불렸던 이 병으로 인해 당시 유럽 인구가 오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인간의 죄는 어땠는가? 홀로코스트로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0만 명이 학살당했다. 쥐와 죄는 글자 모양도 묘하게 비슷하다. 좁은 틈으로 파고드는 것도 기가 막히게 닮았다. 조지 오웰은 끔찍한 쥐를 통해 비참한 죄의 속성을 밝히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현재 우리는 위력에 몸살을 앓고 있다. 위력이란 '상대를 압도할 만큼의 강력한 힘'이다. 위력은 감시받거나 통제되지 않는 권력이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할 때 발생한다. 국가 권력,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CCTV, 휴대전화 위치정보 등 우리를 24시간 지켜보는 눈이 공기처럼 존재한다. 또한, 기술의 발전으로 빅데이터를 통한 개개인 추적 관리가 강화되었고 우리는 더욱 치밀한 감시 아래 강력히 통제당하고 있다.


1948년에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에 잠식된 36년 후 미래의 모습을 <1984>에 담아냈다. 1984년은 이미 지나갔지만, 조지 오웰이 말한 1984년은 현재진행 중이며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윈스턴은 결국 패배했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소규모의 저항 운동은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쥐 앞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한 남자의 죄보다 이 시대에도 계속 비대해지는 빅브라더를 방관하는 죄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이학기 반장의 저서 <서른, 진짜 나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중에서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학기 반장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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